2015.11.17
폰을 버리고 신용카드도 모두 버리고 도망친지 10여분쯤 되었을까. 소윤이 전화번호가 010 2411 5... 뭐더라? 기억이 안 난다. 스마트세대는 무슨 여자친구 한 명의 전화번호도 기억 안 나는데 스마트하기는 뭐가 스마트하다는 말인가. 폰을 버린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다행히 누가 가져가지는 않아서 다시 전원을 켜고 중요한 전화번호를 수첩에다가 적었다. 현금을 찾을 수 있을까?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신용카드를 줏어서 근처의 편의점을 들어갔다. 혹시나 몰라 조금 기다렸다가 덩치 큰 남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뒤따라 들어갔다. 입구의 카메라는 피한 것 같은데 현금서비스를 받기 위해 단말기 앞으로 선 순간 그 카메라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메라가 사람을 잘 찍을 수 있는 위치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최고한도 500만 원을 그대로 인출해버렸다. 다른 카드에서 400만 원을 인출했다. 현금을 찾은 나는 나오면서 신용카드를 꺾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집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의 모텔에 현금을 내고 들어갔다. 맥주 한 캔을 따고 목에 흘려 넣으면서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설마 민성우라는 사람이 연관이 되어 있다는 건가? 아니지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연히 강도에 의해 이모부와 이모가 살해당했고 나는 때마침 들어간 것인데 최근의 여러 가지 사건 때문에 근거 없는 함정에 빠졌다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아침이 되면 알겠지. 침대에 기대서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무언가를 치우는 것 같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간이 벌써 10시다. 모텔에서는 시간 가는 걸 모를 정도로 어둡게 만들어놓는다는 것을 깜빡했다. 우선 TV를 틀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금리를 인상함에 따라... 이병헌 주연의 내부자들이 시사회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한수희가 새로 시작되는 MBC 드라마 악마의 속삭임에 캐스팅되어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한수희는 이번 드라마에서는 기존과 다른 모습으로... 우리 궁궐을 찾아서 두 번째 이야기가..."
내 이야기는 없는 모양이다. 하루 정도였으니 회사에서는 잔소리 좀 들으면 될 테고 현금서비스받은 거야 상환하면 될 테니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역시 내가 오버한 것 같다.
"16일 저녁 늦게 서울 동작구 보라매동 모 아파트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부부인 C (57. 남)씨, K(55. 여)씨가 부엌에서 흉기에 찔려 있었으며 119와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져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딸인 C(21. 여)씨는 지금 행방이 묘연하며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인 입양된 아들인 C (32. 남)씨의 행방을 뒤 쫓고 있다고 합니다. 경찰은 최근 C씨가 도박 및 주식 등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범행 동기를 수사하고 있습니다. C씨는 B잡지사 에디터로 일하고 있는 중이며 최근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날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 이야기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상세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저런 스토리를 짜 맞춘 거지? 내가 에디터로 일하는 것을 알아낸 것이나 그럴듯한 범행 동기를 어떻게 끄집어낸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희가 잘 숨었기를 빌어볼 뿐이다. 민성우는 믿을 수 없고 박민희는 이미 죽었다. 한 명 남은 사람은 엄진웅이라는 교도관인데 교도관에게 어떤 정보를 알아낸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수사권이나 어떤 영향력도 없다.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엄소윤 씨?"
"예 제가 맞는데요. 무슨 일로 그러시죠?"
"광역수사대 최도철이라고 합니다. 혹시 최현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예 남자친구인데요."
"머 뉴스를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라매 살인 용의자로 행방을 뒤쫓고 있습니다. 그 행방을 아시나 해서요."
"어제 아침에 잠깐 통화한 뒤 연락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무슨 근거로 살인 용의자로 특정하는 거죠?"
"범행 동기가 있긴 하더라고요. 최근 도박이나 주식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런 걸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매사에 차분하고 요행을 바란 적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요. 남자친구이니까. 믿고 싶을 거예요. 10년을 알았던 사람이 이중생활을 하던 다른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이봐요. 그런 드라마 이야기 쓰시지 마시구요. 저는 오빠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고 있어요."
"믿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만약 숨겨준다던가 그러면 범인은닉이라는 범죄행위인건 아시죠? 그리고 지금 그 집 딸도 살아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용의자는 범인이 아닌 것도 아시죠? 무죄추정의 원칙이라고요. 헌법 제27조 제4항에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아~~ 법을 잘 아시네. 이런 곳에서 일하려면 법도 알아야 되나 보죠? 아무튼 소윤 씨가 생각하기에 요즘 이상한 행동이나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는 거죠?"
"예 전혀 없었어요."
"서로 사귀는 사이니까. 둘만의 아지트 머 그런 거 없어요?"
"잠깐만 최도철 형사님이라고 하셨죠. 사생활 침해로 진정을 넣어드릴까요? 제가 왜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는 거죠."
"거기 갔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물어보는 거죠. 없으면 됐어요. 아무튼 연락 오면 바로 연락 주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연락 온 것을 말 안 했다고 해서 범인은닉에 해당되지는 않겠죠? 혹시 공무집행 방해에 해당할까요. 경찰이 저를 주시하고 있을 것을 아는데 눈에 띄게 연락할 정도로 미련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뻔히 오빠에게 도피를 권하는 그런 미련한 짓은 안 할 거예요. 그럼 바빠서 이만."
경찰은 다시 돌아갔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대체 오빠는 어떤 일에 휘말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빠와 마지막 통화 이후에 행적을 전혀 모르니 어떤 상황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오빠가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이렇게 치명적인 것이라니 걱정된다. 이대로 잡힌다면 오빠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을 것 같지 않았다. 멍하니 회의실에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엄대리님 카드 발급하셨어요? 사인 받아야 된다고 하는데요." 카드? 내가 언제 카드를 발급 신청한 적 있나?
"누가 찾아왔어?"
"예 여성분이 오셔서 기다리고 있어요." 카드 발급하러 보통 남자가 오지 않나? 소윤은 회의실에서 나와 자신의 자리 쪽으로 향했다. 최도철은 가지 않고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현대카드 발급하셨죠. 여기에 사인해주시면 돼요. " 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봉투를 하나 내밀면서 한쪽에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내 이름이 아닌 고객지원부 임시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옆에 쪽지에는 '언니 저 경희예요.'라고 적혀 있었다. 흘낏 여자를 쳐다보고 적혀 있는 곳 밑에다가 '2시 사거리 스타벅스'라고 적어주었다.
"예 수고하셨어요." 경희와 나는 서로 인사하고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헤어진 후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켜고 작업을 시작했다. 1시간쯤 지났을 때 소윤은 팀 막내를 바라보며 "지은 씨 이거 고객지원부 임시은 씨 갖다줘."
"예? 이게 왜 엄대리님한테 있어요?" 손짓으로 그냥 휘휘 저으며 "머 이야기하면 기니까 그냥 가져다 줘."
팀원들과 점심식사를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펴봤다. 적어도 형사처럼 보이는 사람 한 명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오빠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경희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경찰도 믿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어떻게 따돌려야 하나. 경희는 오빠에 대해서 할 말이 분명히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어떻게 만나야 문제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