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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08. 2019

송강 정철

충북 진천의 정송강사

젊음과 노쇠함은 생각의 차이도 만드는 것인가. 조선 역사에서 최초로 사림의 분파가 일어날 때 서울의 서쪽에 몰려 살던 서인은 심의겸, 정철, 윤두수 등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서울의 동쪽에 몰려 살던 동인은 유성룡과 이산해 등 젊은 영남 출신이었다. 그러나 동인들도 시간이 지나 생각이 고착화되면서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리게 되는데 남인은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박해를 당하게 된다. 서인들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대전 송시열의 노론, 논산 윤증의 소론으로 갈린다.

진천에 자리한 정송강사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9호로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鄭澈)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이다. 경내의 건물은 사당·내삼문·외삼문·홍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내삼문과 외삼문 사이의 좌측에는 송강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다. 기념관 내에는 송강의 유품인 은배(銀盃)·옥배(玉盃)·서간첩(書簡帖) 등이 보관되어 있다. 사당의 남쪽에는 묘소가 있으며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저 앞에 보이는 전각에 자리한 것은 진철 정철 신도비로 조선 현종 4년 1665)에 세운 것으로 천부적인 문재를 발휘하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는데 신도비의 글을 문정공 송시열이 지었으며 김수증이 전서하고 글씨를 썼다고 한다. 선생의 묘소는 사당의 서쪽에 있다. 

서인의 영수이며 동인과 때론 대결각을 보였던 송강 정철은 술을 상당히 좋아했다. 그의 장진주사라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세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 그의 시들을 보면 풍류가이면서 자연 친화적인 사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탐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술과 관련된 시조만 20여 개나 되며 술과 함께 살았던 문학가로 생각되고 있다. 

타고난 문인의 기질을 발휘했지만 동인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임진왜란 바로 3년 전인 1589년 기축옥사 때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동인의 인사 1,000여 명을 처형하고 수백 명을 귀양 보내면서 동인과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면서 원한을 사게 된다. 

수많은 시조를 남겼으며 동인에게 원한을 샀던 송강 정철에게도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581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전라도 기녀인 진옥(眞玉)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진옥은 정철의 호인 송강(松江)의 ‘강(江) 자를 따라 강아(江娥)라고 불렸다. 기녀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첩으로 호칭이 불리게 된다.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네 고움을 사랑하네."  


그리고 전라도를 떠나 10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강아는 정철만을 생각하며 기다리다가 그의 귀양 소식을 듣고는 적거(謫居) 생활을 보살피고자 부랴부랴 달려왔다는 것을 고백했다. 정철에게 강아는 그 이상의 존재였으며 예술적 호흡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현명한 여인이기도 했다고 한다. 자연과 벗 삼아 시조를 읊던 송강 정철의 흔적이 진천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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