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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08. 2019

대전 독립

대전 근현대사전, 근대도시, 그 100년의 역사

지인과 책을 제본하기 위해 대전의 한 인쇄소를 찾은 기억이 난다.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쓰는 편이라서 그곳에 걸려 있던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사진을 한 번에 알아보았다. 왜 그 사진이 거기에 걸려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지금은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지만 그 집안은 독립운동가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알아봐 주는 것에 내심 반가워하면서도 나중에 작은 목소리로 독립운동을 했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아직 그 역사는 이어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전 독립운동사 100주년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쪽으로는 회덕현이 있고 서쪽으로는 진잠현, 그리고 공주의 공주목이 자리했던 대전은 철도부설과 함께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10년 통계로 보면 대전의 인구는 총 4,219명으로 한국인이 1,740명, 일본인은 2,479명이었으며 1917년 대전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는 한국인의 거의 3배에 달하게 된다. 

철도로 인해 발달하기 시작하던 대전에 주로 거주하던 곳은 원동, 중동, 정동일대로 일본인들은 원동에 몰려 살았다. 전국에 혼마치(本町)라는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냥 중심지라는 의미의 일본말이다. 한참 시끌벅적한 목포에도 혼마치가 있고 충무로도 혼마치, 부산 동광동도 혼마치다. 다른 지역의 일본문화를 만날 수 있는 지역을 니혼 마치(日本町)라고 부른다. 어떤 중심지를 기준으로 서쪽에 있으면 니시(西), 동쪽에 있으면 히가시(東)라고 앞에 붙이면 된다. 

독립운동사에서 대전은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적지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 동춘당공원 중심에 몰려 살던 은진 송 씨의 후손인 연재 송병선은 1905년 11월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결될 때 그 역시 죽음을 택하며 자결했다. 동생 송병순도 구국활동을 했으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선의 역사가 끝나자 1912년 따라 자결한다. 

대전의 혼마치라고 불리던 중심에 일본인들이 몰려 살기 시작하기 전 1895년 무관이었던 문석병이 지금의 유성에서 거병하여 최초의 을미의병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후 회덕현에 있던 관아(지금은 자리만 남아 있으며 회덕의 주민센터 자리)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공주부로 진격한다. 

지금 대전의 원도심에 가보면 목척교가 다시 복원이 되어 있는데 목척교는 1912년 대전에 주둔한 일본수비대의 병기를 수송하기 위해 최초로 만들어졌다. 드라마에서 보면 당시 돈을 연상할 수 있겠지만 5원이라는 돈은 개인적으로 작은 돈은 아니지만 당시 목척교의 총공사비는 4,600백 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건설된 다리의 모양이 나무자의 모양을 닮아서 목척이라는 설이 있다. 

100년인 1919년 5월 삼일만세운동으로 수감자가 폭증하자 조선총독부령 제36호에 의해 중구 중촌동에 대전 감옥소가 만들어진다. 주로 장기형을 받은 정치범을 수용했으며 대전 감옥소에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수감되었는데 도산 안창호, 몽양 여운형, 심산 김창숙 선생도 그 속에 있었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만나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이다. 대전의 삼일만세운동은 3월 3일에 시작되었으며 이는 지금 국수 시장이자 쌀이 거래되던 시장인 인동시장에서 3월 16일에 대규모로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오지 않을 그 미래에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던 대전의 본정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인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점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지금 대전에는 갤러리아와 롯데가 대표적인 백화점이지만 당시에는 미나까이라는 백화점이었으며 대표적 양복점으로 '아무르 양복점'이었는데 지금 명품을 상상하면 된다. 당시 한국말로 아무르라고 불렀던 이름은 아모르(Amor)로 라틴어로 사랑을 뜻하며 운명을 뜻하는 파티(Fati)와 결합되면 고통, 상실, 좋고 나쁜 것을 포함하여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운명이라는 의미의 아모르파티가 된다. 

일제에서 해방되고 나서도 대전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부침을 거쳤으며 이념이 극대화된 그 시기에 무단으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정부에 의해 자행되는 제노사이드(Genocide)가 일어난다. 그 후 대전은 4.19 혁명의 길목이며 3.8 민주화 혁명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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