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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12. 2019

추억

안성의 중앙시장

과거를 명확하게 기억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고 나서의 과거의 기억에는 보통 추억이라는 것이 스며들어 있다. 좋은 추억도 있지만 안 좋은 추억도 있고 기억에 남는 장소도 있고 가고 싶지 않은 장소도 있다. 전국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장이 열리고 그곳에는 지금도 전통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그곳에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쌀이 맛있기로 유명한 안성의 장은 어떤 곳이었을까. 

안성의 장날은 끝의 숫자가 2일과 7일에 열린다. 그렇지만 안성의 중앙시장은 상설시장이기도 해서 장날이 아니어도 사람들이 오가고 상인들도 좌판을 벌이고 있었다. 안성시는 경기도에서도 규모가 작은 도시이지만 예전의 안성장은 조선시대 대구, 전주와 함께 서울의 관문으로 3 대장에 들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장이었다. 

큼지막한 마늘이 갈릭 구이를 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서울보다 두세 가지가 더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던 것을 보면 대단히 큰 장이라는 것을 미루어 생각해볼 수 있다. 

추운 겨울날에 안성장을 찾아가는 길은 조금은 움츠려 들기는 했지만 돌아볼만했다. 안성시에서 유명한 안성맞춤이란 말을 탄생시킨 유기(놋그릇)는 이제는 시골장터에는 볼 수 없지만, 장터에서 1km 지점에 있는 '안성맞춤 유기공방을 찾으면 만나볼 수 있다. 

노상주차장은 무료 운영이 되고 있는데 2시간까지 주차를 허용해주고 있어서 이곳에 차를 대고 장을 볼 수 있다. 비교적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안성의 특산물은 포도와 유기그릇으로 유명한데, 포도는 9~10월에 안성포도장이라 할 정도로 많은 포도가 안성장에 나온다. 

안성장의 특징은 청년들이 모여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열고 있는 청년생생몰에 있었다. 

직접 찾아가 보니 청년상인 창업 거리에 있는 파사드는 상당히 깔끔하고 깨끗해 보였다. 그런데 이곳의 매력은 바로 골목 안쪽에 있었다. 전국 물류의 집산지로 활기 넘쳤던 안성시장, 허생전의 허생이 가 삼남에서 올라오는 물품을 매점매석하기 위해 눈을 번뜩이던 안성장이었다. 

안쪽으로 들어오니 단아하게 한복을 입고 있는 신사임당이 반겨준다. 최대화폐가 50,000원권을 열면서 신사임당은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안성장의 매력은 골목을 탐하면서 돌아보는 추억에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서도 등장하는 안성장은 1,705년 경의 택리지 1,747년 비변사등록, 1,794년 부역 실총, 1,924년 5월 개벽 제47호에 언급이 되기도 한다. 

안성장이 한참 활성화될 때의 모습이 추억처럼 연출이 되어 있었다. 안성시장은 서소문외 시장 중에서 가장 크기 때문에 도적들도 모인다고 한다. 세금을 거두게 만든 농단 이후로 장세를 거두기 시작했는데 바로 안성에서 거들어 들이는 장세가 경기도에서 가장 많았다고 한다. 

"1,924년 '5월 개벽 제47호' 안성시장이라면 이야말로 중부 조선에서 유명한 시장이다. 바로 전 조선 3대 시장(대구, 전주, 안성)의 1이다." - 5월 개벽 제47호

지금은 유기전을 사용하는 가정은 많이 없지만 유기는 예로부터 그릇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던 그릇의 재료였다. 그리고 한지를 의미하는 지전, 갓신으로 유명한 혜전, 목물전, 싸리로 만들었다는 싸전, 약방, 포목점이 안성에 집중되었다. 소를 파는 우시장으로도 잘 알려진 안성의 국밥은 그래서 유명해진 것이다. 안성시의 안성맞춤은 바로 추억의 안성맞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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