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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14. 2019

세종의 흔적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의 묘

조선조 평화로운 세상을 열었다는 세종의 뒤에는 피의 대가가 있었다. 영돈녕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로 태어난 순흥안씨는 자신의 딸이 1408년(태종 8)충녕군(忠寧君)이도(李祹)와 가례(嘉禮)를 올려 빈(嬪)이 되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개봉(改封)되게 되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자신이 경험했던 외척의 문제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세종의 외척 세력을 모두 차단해버렸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죄가 없더라도 무고를 하게 되면 왕의 의지에 따라 죽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뒤에 이 사건은 심온이 국구로서 세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朴習)이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녀의 남편인 심온은 세종이 즉위한 뒤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청(沈泟)이 군국대사를 상왕(上王: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한 일로 대역(大逆)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그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된 것은 태종의 정치적인 판단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심온의 부인이며 소헌왕후의 어머니의 묘소로 가는 길은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묘소까지 가는 길은 조성이 잘 되어 있어서 올라가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안씨부인은 장녀인 소헌왕후를 비롯한 6명의 딸과 아들 영중추공 공숙공 정이공3형제의 9남매를 출산했고 세종대왕의 부분인으로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교육에 헌신하였다고 한다. 

세종 26년(1444)11월 24일에 별세하자 사위인 세종이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에 예장했다가 세조13년(1467) 5월 3일 왕명으로 이곳에 천장 되었다. 약 60평의 묘역에는 봉분이 만들어져 있으며 묘 앞 중앙에는 글씨가 마모된 원래의 대리석 묘비와 1910년 새로 건립한 묘비가 있고 그 앞에 상석 향로석 장명등 그리고 문인석이 좌우에 갖추어져 있다. 


안 씨의 인생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심온을 제거한 신하들은 왕비 심 씨도 폐위하기 위해 공세를 했지만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심온은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태종의 명에 따라 독배를 마시고 자결하면서 자신을 무고한 반남 박 씨 집안과 혼인하지 않을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지금도 청송심씨는 반남 박씨와 혼인하지 않는다. 심씨의 어머니 안씨는 관노가 되어 자신의 딸과 만나지 못하다가 사위인 세종이 완전한 권력을 쥐었을 때 비로소 풀려나게 된다. 세종의 큰 아들인 문종은 즉위 후 할아버지 심온을 신원함으로써 평생을 한과 눈물 속에서 살았던 어머니 심 씨와 할머니 안 씨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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