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용주사는 정조의 의지였다.
고려가 왕조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 데에는 고려왕실의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불교라는 종교가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종교가 재산을 확보하고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려고 할 때 문제는 생긴다. 사람은 욕심을 가질 수 있지만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종교에서만큼은 배제되어야 한다. 고려의 불교가 큰 폐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고 조선을 창업하면서 이성계는 불교를 배척하였다. 국가의 종교로서 큰 역할을 했던 불교가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실에서는 적지 않은 불교행사에 영향을 행사했지만 그때마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 유교가 불교보다 더 우위에 있었던 조선시대에 용주사는 정조의 의지에 의해 다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정조는 즉위 13년을 맞던 해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수원화성과 행궁을 만드는 대대적인 역사를 하면서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그 주변에 폐사된 갈양사터에 절을 새로 중창하여 용주사라 이름 붙여서 사도세자 묘의 능침사찰로 삼았다.
용주사는 폐사된 사찰이었다. 고려 광종 때는 혜거국사가 머물며 국가의 축원 도량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만 갈양사는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사지로만 남아 있었다.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창건주는 염거화상으로 도의국사에 이어 가지산문 제2대 조사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잃지도 않고 말을 잃지도 않는다고 한다. 늘 부모의 마음을 살피고, 공경하며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을 효도의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 이름은 낙성식 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을 ‘용주사’라 불렀다고 한다.
정조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두 사람이 있다. 실학자로 대표되는 정약용과 조선의 3대 화가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이다. 화성이 정약용의 혼이 깃든 도시라면 용주사는 김홍도의 솜씨가 깃든 사찰이다.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고 그곳의 명승지를 수십 장(丈)이나 되는 긴 두루마리에 그려 바치기도 했다. 이 사찰을 건립하면서 정조는 도화서의 유능한 화가 김홍도에게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인 대웅전 후불탱화를 그리게 하였다. 용주사의 탱화는 탱화 가운데 최초로 서양화법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한 그림이다.
효를 행하는 길을 효행이라고 한다. 효를 생각하는 마음을 효심이라고 한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에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어쩌다가 부모가 되었기에 효를 받아야 되는지는 아직도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누구나 자신의 손톱 밑의 가시가 가장 아플 수가 있다. 손톱 밑의 가시가 자식의 허물이라면 가슴이 떨리는 쓰라림이 부모의 허물일까.
자신의 아비의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를 정조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가슴 아픈 기억을 릉으로 만들어 모시고 이곳에 사찰을 세워 기렸다. 할 수 있기에 정조는 효심을 다해 이곳을 다시 열었다.
1790년에 건립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천보루(天保樓), 나유타료(那由他寮), 만수리실(曼殊利室), 삼문각(三門閣), 일주문, 수각(水閣), 동별당(東別堂) 등이 있는 용주사는 1993년 천불전을 짓고 만수리실을 개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주사는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딱 10년 전인 1790년(정조 14)에 창건되었다. 10년의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정조는 많은 것을 진행시켰다. 제22대 왕 정조(1776년~1800년 8월 18일), 제23대 왕 순조(1800년 8월 23일~ 1834년) 및 정순왕후의 수렴청정하며 격변의 시기에 조선왕조는 준비 없이 다가서게 된다. 1762년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8일 동안 밥도 물도 먹지 못하다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결국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를 기리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위치한 화산(花山)과 연계성을 두기 위해 수원 읍성의 이름을 비슷한 발음의 ‘화성(華城)’으로 정하였으며 용주사를 다음 해에 창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