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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7. 2019

지키다

동구 박팽년 유허지

대전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회덕현에서는 여러 인물이 나왔는데 보통은 은진 송 씨 계열만 많이 생각하지만 회덕현 흥농촌 왕대 벌(동구 가양동)에 태어난 사육신 박팽년도 있었다. 평소 가야금 타기(필자와 비슷한 취향)을 좋아해서 스스로의 호를 취금헌으로 지었다고 한다. 풍류를 즐길 줄 알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지킬 것은 꼭 지켰던 사람이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위해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거사를 준비하다가 실패하고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숙종 때 명예가 회복된 후에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등 여러 업적을 남긴 박팽년은 집현전 학자 중 경술과 문장·필법이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란 칭호를 받았다는 것을 보면 모든 것에 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시대와 이념을 떠나 그의 절의정신은 고귀한 가치로 평가받고 있는데 옛 사람인 자하는 이런 말을 했다. "어진 이를 어진 이로 대하기를 마치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고, 부모를 섬길 때는 자신의 힘을 다할 수 있으며, 임금을 섬길 때는 자신의 몸을 다 바칠 수 있고, 벗과 사귈 때는 언행에 믿음이 있다면, 비록 배운 게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사육신중에 한 명이 대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참 의미가 있다. 게다가 우리가 지금 모두 사용하는 한글을 만드는 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까지 하지 않았는가. 지금의 유허비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에 집이 남아 있는 송준길이 썼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메라. 야광(夜光) 명월(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 이시랴.” 

그는 1434년 과거에 급제한 뒤 정 9품 정자에 제수, 단종 즉위년인 1452년까지 18년 간 집현전에서 일했으며 144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언문(諺文) 운회(韻會) 번역 작업을 시작으로 1446년 주해(註解), 그리고 해석과 범례 서술에 앞장서서 일했다. 박팽년이 사형되기 전 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는 안타까운 마음에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마음을 돌려 나에게로 돌아와서 이번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 다고 숨긴다면 살려주리라” 하였지만 박팽년은 마음속이 불편하여 이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며 자신의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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