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03-5

2015.11.20

한수희와 이야기를 하고 나오니 정신적인 부담감이 갑작스럽게 몰려오면서 소윤은 온몸에 피로의 누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현오빠의 무죄를 믿어주고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당차게 나갔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쪽지의 내용대로라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보다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거의 20년이 지난 사건의 기록을 제대로 조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무언가 밝혀낸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만약 그 사건이 조작된 것을 조금이라도 알아냈다고 한들 지금 이 사건과는 별개 아닌가. 한편 현 오빠를 생각하면 18년의 시간 동안 범죄라는 시간에 갇혀 있다가 다시 운명의 굴레에 휘말려 바람 앞에 등불 신세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극단적인 절망과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제대로 된 친구 하나 만날 수 없는 그런 삶을 온몸으로 받아가며 지금까지 버텨왔던 것이 아닌가. 이유를 불문하고 우리 사회는 범죄자의 가족 대해 연좌제를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사실상 연좌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게 차가운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는데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모자를 쓰고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지만 저 여자는 분명히 현이라는 용의자의 여자친구인 것 같아 보인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친 남자와 관계를 끊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그래서 저렇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다니는 지도 모르지만 뒤를 쫓다 보면 특종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묘한 기대감이 든다. 가까이 가서 확실하게 확인을 할 필요성은 있다.


"아가씨. 무악 현대 아파트 어떻게 가면 돼요?" 7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소윤이에게 길을 물어왔다. 소윤은 아저씨의 인상착의를 잠깐 본 다음 무악 현대 아파트라는 곳의 지명이 기억나는지 생각해보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악 현대 아파트요? 잘 모르겠는데요."

"당최 서울은 복잡해서 알 수가 없네... 어떻게 가야 하지.. 이 근처라는데." 소윤은 자신의 시계를 한 번 확인한 다음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잠깐만요 제가 검색해드릴게요."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 고마워."

소윤은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실행하고 검색을 했다. 1분쯤 지났을까?

"할아버지 저기 보이는 3번이라는 출구 보이시죠?"

"응 저기.... 근데 어딜 말하는 거여?"
"아 잠깐만요 이쪽으로 오셔서 보시면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 안국과 3이라는 숫자가 있잖아요."

"아~~~ 네모난 기둥 같은 거 말이지?"

"예 그거예요. 거기로 내려가서 구파발 방면으로 타고 가시다가 독립문역에서 내리시면 보이실 거예요."

"아이구.. 아가씨가 참 착하네 그려. 고마워."

"예~~"


길을 가르쳐주고 때마침 온 버스를 타고 가는 소윤이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출발지와 목적지가 정해진 것처럼 인생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얼마나 편할까. 풀어가는 재미는 없겠지만 편하기는 할 것이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현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몸이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이 무기력한 느낌이 싫다.


회사 근처에서 엄소 윤이 오기만 기다리던 최도철은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오는 엄소 윤을 발견했다. 갑자기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간신히 누른 채 엄소 윤에게 다가간 최도철은 자신의 신분증을 모자 밑에 디밀었다. 넋 놓고 가다 갑작스 럽 운 장애물에 깜짝 놀란 소윤은 이내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엄소윤 씨 대체 어딜 갔다 왔나요."

"제가 제 일정을 형사님에게 알려드려야 할 이유가 있나요?"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 쇼를 하는 거 아닙니까."

"쇼라니요. 전 그냥 누군가가 절 미행하는 것이 싫었을 뿐이에요."

"잠시 서로 가서 이야기 좀 하실까요?"

"제 동의를 얻어서 임의동행이라도 하시려고 그러신 거예요? 전 현 오빠의 도피와 관련된 행동을 했다고 인정될만한 어떠한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이런 경우 강제하지 못하지 않나요?"

"그래요. 맞아요.. 그런데 아까 전에 혹시 넘어트린 남자 기억하세요? 그분을 넘어트리는 것을 제가 보긴 했거든요. 특정인 상해에 대한 현행범으로 체포도 할 수 있어요."

최도철의 말을 들은 소윤은 웃었다. "웃겨요?"

"아니요. 안 웃긴데요. 우선 그 남자의 신상은 확보하셨어요? 그리고 그분이 고소라도 하시긴 했고요? 만약 안 했으면 피해자가 없는데 어떻게 가해자가 만들어지죠?"


이 여자한테 이런 어설픈 협박 같은 것이 안 통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역시나 예상한 그대로다. 괜히 자신의 카드를 보여준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 이때 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예 팀장님."

"별일은 없어?" 최도철은 엄소 윤을 흘낏 바라보고 나서 전화기에 대고 말한다.

"예 별일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볼일이 없으면 전 바빠서 들어가볼게요." 최도철은 난감한 상황을 모면해서 그런지 몰라도 손으로 가라는 듯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김수진은 엄소 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최도철에게 다가간다. 5분쯤 기다렸나 통화가 끝나고 최도철은 몸을 돌려 김수진 쪽으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최도철은 누군가 하는 눈빛으로 김수진을 위아래로 흩어보았다.

"누구시죠? 저를 아세요?"

"아 저는 21 투데이의 김수진이라고 합니다." 가방 속에 있는 명함지갑을 꺼내 최도철에게 건넨다. 최도철은 명함을 받아서 한번 본 다음 다시 김수진의 얼굴을 바라본다. 기자 같아 보이긴 하는데 왜 갑자기 나에게 인사를 했을까.

"다름이 아니고 제가 최현 사건에 관심이 좀 많거든요. 그런데 지금 들어간 사람 최현 여자친구 엄소윤 맞죠?"

"예 그렇긴 한데요. 별거 없었어요."

"별거가 없다. 전 오늘 어디 갔다 왔는지 알고 있는데요."

"진짜요? 어딜 갔다 왔는데요? 최현을 만나던가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요."

"속시원히 말합시다."

"제가 형사님에게 얻을 것은 뭐가 있죠? 지금 형사님은 저에게 아무것도 오픈하고 있지 않잖아요."

"그래요. 저기 커피숍으로 들어가죠. 강형사 잘 지켜보고 있어."

"예 잘 지켜보겠습니다."


커피숍으로 들어간 김수진과 최도철은 무언가를 말하며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최도철은 조금은 놀란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명함을 김수진에게 건네주었다. 강형사가 보기에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알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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