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03-6

2015.11.20

민경 감은 멍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불법 밀수품이 들어있는 박스가 가득하게 채워져 있는 상태였다. 가로 50cm, 세로 25cm, 높이 24cm 크기의 박스가 500개, 컨테이너가 두개이니까 총 1,000개다. 만약 박스 하나에 5만 원짜리로 가득 채우면 6억, 저 많은 박스를 현금으로 채우면 무려 6,000억이다.


처음에는 황 도치가 이끄는 범죄조직의 불법자금을 뒤쫓는 일로 팀이 구성이 되었다. 일부 정치인들과 끈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불법도박장과 신도시 개발의 이권 확보로 컸다는 것 외에는 별로 밝혀진 것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그림은 이것 보다 훨씬 컸다. 일개 경찰서장과 몇 명의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삼청 Triad라고 별칭이 붙은 그들은 내놓으라는 정치인, 법조인, 기업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 도치 같은 깡패는 그냥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전체에 오랜 시간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금원을 공동 출자하고 관리했다. 그리고 그 자금원은 대부분 무기명 채권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민 경위는 무기명 채권에 대해 생소했었는데 사건을 조사하다가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었다. 1993년 8월 김영삼 정부 때 단행된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 이른바 검은돈을 모을 방법이 필요했었다. 1997년 외환위기로 달러 부족과 정부 곳간에 쓸 현금이 부족해지자 특별혜택을 주며 돈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무기명 채권을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용안정채권(근로복지공단), 증권금융채권(증권금융), 중소기업구조조정 채권(중소기업 진흥공단) 등 무기명 채권 3종을 3조 7천730억 원 규모로 발행했다. 재벌들 뿐만이 아니라 정치인들도 상속. 증여세가 면제되는 무기명 채권을 사들였다. 그 무기명 채권중 상당수가 삼청 Triad의 자금원이 되었다. 2002년에 대선자금으로 전달한 삼성그룹의 국민주택채권 역시 무기명 채권이다.


문제는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황도 치를 버리기로 결정하면서부터 발생했다. 우리 팀은 황도 치를 잡아들이는 수준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그들은 황도 치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을 알게 된 황도 치는 자신의 수족들을 이끌고 몰래 잠입해서 무기명 채권을 빼내서 숨겼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채 쫓기던 황도 치를 마지막에 발견한 것이 바로 김경 감이었던 것이다. 그 무기명 채권을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는 박수찬 총경과 김윤수 경감뿐이 모른다. 분명한 것은 박수찬 총경이 죽기 2일 전에 그 무기명 채권을 어딘가 숨겼다는 것이다. 그들이 민 경위에게 찾아온 것도 그때쯤이다.


"민성우 경위님이시죠." 검은색 세단을 타고 온 일행 중에 50쯤 돋보이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형사의 직감으로 차가운 남자라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예 제가 민성우가 맞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안기부 황 차장입니다. 이번 황 도치 사건 때문에 왔는데요. 잠시 저쪽에서 이야기하실까요?"

"안기부가 깡패 사건에도 관여합니까?"

"그러니까 이야기 좀 하자니까."

"그럼 저도 보고 좀 하구요."

"당신들 지금 이렇게 여유 있을 수가 없어요. 민성우 경위님이라고 하셨죠? 제 말 잘 들어셔야 돼요."


안기부 황 차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믿기 힘들 정도로 심각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 팀은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렸고 모든 팀원이 낭떠러지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때 민성우 경위는 그들에게 협조하는 것이 모든 팀원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김윤수 선배의 아들이 찾아오던 날 민경 감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도움을 주는 자체가 현철이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그 무기명 채권을 잊지 않고 있었다. 원금만 6,000억 원이나 되던 그 자금 말이다. 그 특정 채권의 상당 부분의 이자는 당시로서는 낮은 표면금리 (6~7%) 였지만 지금은 상당히 높은 금리다. 그리고 그 이자는 조세특례로 보전하도록 설계되었기에 조세 특례 대상이다. 사실 정치자금으로 그만한 노다지도 없었다. 그들은 현철이라는 친구를 죽이지 않고 온전하게 잡으려고 할 것이다.


TV에서 현이라는 친구의 뉴스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아펐다. 그 당시야 나에게 가족이 없었지만 지금은 딸과 아들이 있고 사랑하는 와이프도 있다. 지금은 이런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그런 처지가 아니다. 그냥 잠시 외면하면 된다. 김윤수 선배에게 아들을 보살펴준다고 한 건 지키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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