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04.18
내부적으로는 결정이 났다. 경찰서장과 핫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던 우리 팀은 박수진 서장의 결정에 따라 황 도치만 검거가 되면 모든 사건을 종결하고 조서를 작성한 뒤 검찰에 넘기기로 했다. 김경감은 오랜만에 일찍 들어가서 쉴 수 있게 돼서 가벼운 마음으로 통닭을 한 마리 샀다. 김경감은 현철이가 유독 좋아하는 멕시칸 양념치킨을 한 마리 주문하고 멍하니 삐삐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사 생활할 때 처음에는 총이 상당히 거북하고 거추장스러웠는데 지금은 겨드랑이에 차고 있지 않으면 무언가 허전하다. 마치 내 몸이 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달달한 양념과 땅콩가루가 묻어서 빤질빤질한 통닭을 보고 있으니 입안에서 침이 저절로 고인다. 옛날에는 기름만으로 튀긴 후라이드 치킨이 좋아서 그것만 먹었는데 1990년대 중반부터 퍼지기 시작한 치킨 체인점에서 만든 양념치킨 맛에 어느새 중독이 되어버린 것 같다. 올해는 치킨집이 대세인 것 같다. 창업하는 외식 집 3곳 중에 한 곳은 치킨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다. 10년이 지나도 치킨만을 먹고 살아갈까? 정말 많아지고 있다. 김경감은 치킨 두 마리 가격을 지불하고 잘 포장된 치킨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올해는 분위기가 이상하다. 경찰이야 공무원이니 상관이 없지만 대기업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업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설마 나라가 망하려고.
그렇게 크지 않은 집이지만 겨우 마련한 조그마한 아파트는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방이 세 개 정도 있는 10년 된 아파트의 대출이 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경찰일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 갚지 않겠나 싶다. 김경감은 현관문에 열쇠를 꼽고 돌렸다. 살짝 쇳소리가 들리는 듯하면서 문이 열렸다.
"아빠야?"
"응 현철이가 좋아하는 치킨 사 왔다."
"이야. 양념이야? 양념? 맛있겠다."
"당신 왔어요?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들어왔대요."
"그냥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했어. 이번 것도 마무리될 것 같기도 하고 해서."
"그래요? 당신 작년부터 고생했잖아요."
"그러게 잘 마무리될 것 같아. 그렇게 되면 본청으로 들어갈지도 몰라."
"잘되었네요. 식사 안 하셨죠? 마침 제육볶음 하고 매생이국 끓여놨어요."
"매생이? 지금 매생이가 나오나?"
"작년에 사놓은 거 얼렸다가 풀은 거예요."
"시원하겠네."
"엄마 난 치킨 먹으면 안 돼?"
"안돼. 조금이라도 밥 먹고 먹어."
"에이.. 치킨 식으면 맛 없어지는데."
"그럼 식탁에서 같이 먹던가."
김경감은 식탁에서 밥 한 수저를 뜬다음 뜨거운 국물의 매생이를 퍼서 먹었다. 바다내음이 살짝 묻어나면서 입안에서 씹히는 순간도 없이 녹아들어가는 매생이의 참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이때 갑자기 울리는 삐삐 소리가 세 가족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경감은 현철이를 한 번 본 다음 삐삐를 들어서 찍힌 숫자를 보았다. 자신이 아는 전화번호나 팀에서 정한 그런 암호가 아니었다. 김경감은 일어나서 집전화를 들어 찍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4~5번쯤 울렸을 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호춣하신 분이요."
"김윤수 경감님?"
"예 맞는데요. 누구시죠?"
"저 황도 치입니다."
"황 도치? 당신 소재 파악이 끝났어. 지금에 와서 자수하려고?"
"그게 아니라 김 경감님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럼 경찰서로 와서 조서 쓸 때 하면 될 거 아냐."
"경찰서에서 할 말이 아닙니다. 직접 만나야 해요."
"무슨 수작이야."
"수작 아닙니다. 제가 장부 하나랑 다른 거 넘겨줄 것이 있어요. 전화로 이야기는 못하고 만나야 합니다."
"그래 어디서 보자고."
"광진교 밑에서 한 시간 뒤에 보시죠."
"한 시간 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저 경찰에게 잡히기 전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꼭 나오셔야 합니다. 되도록이면 혼자 오세요."
황도 치는 마지막 말을 한채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김경감은 곰곰이 생각해봤다. 황 도치가 경찰에 잡히기 전에 죽는다는 것은 그 윗선에서 황 도치가 잡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들이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현철 엄마. 나 지금 나가 봐야 될 것 같아."
"어째 좀 일찍 들어왔다고 하더니. 위험한 거 아니죠?"
"아니야. 그냥 사건 때문에 만나야 될 사람이 있어서 그래."
"알았어요. 조심히 갔다 와요."
"현철아 치킨 다 먹지 말고 남겨놔야 해. ㅎㅎ 아빠 술안주 하게."
"내가 돼지인가. 두 마리를 다 먹게."
김경감은 퇴근할 때 입었던 차림 그대로 다시 나갔다. 광진교까지 가는 길은 퇴근시간에 걸린데다 공사까지 있어서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1시간이 조금 넘게 지나 광진교에 도착한 김경감은 광진교 밑쪽으로 걸어내려 갔다. 혹시나 몰라서 총을 꺼내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면서 광진교 밑쪽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다리 밑에 누군가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앉아 있었다. 황도 치였다.
"황 도치. 무슨 일이야."
"김 경감님 오셨어요?.. 이리.. 이리.." 황도 치는 말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듯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누구한테 당한 거야."
"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잘 들으세요. 광화문역 4번 출구 쪽으로 내려가면 지하철 물품보관함 28번을 열어보세요. 그리고 이건 열쇠."
"이게 뭔데 그래?"
"보시면 알 거예요. 그리고 그거.. 위험한 겁니다. 잘.. 잘.."
황도 치는 겨우 날숨을 붙잡고 있다가 김경 감에게 지하철 보관함 이야기만 전달하고 죽었다. 김경감은 당혹스러웠다. 용의자가 사망했으니 기소할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경찰서로 전화해서 현장을 수습할 경찰들을 호출하고 박수진 서장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서장님. 김윤수입니다."
"어 그래."
"다름이 아니라 황도 치를 찾았는데 죽기 바로 직전에 찾았습니다."
"그래서 죽었어?"
"예 그렇습니다."
"누가 그렇게 한 건데?"
"그건 모르겠습니다. 좀 전에 전화가 와서 광진교 밑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와보니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그래 알았어? 현장 수습하고 들어와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김경감은 아까 황 도치가 말한 지하철 물품보관함 이야기를 하려다 자신이 먼저 확인한 후 보고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현장에는 경찰과 야밤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놀란 시민들이 나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119 구급대원들이 황 도치의 시신을 수습해서 법의학 연구소로 가져갔다. 늦은 시간이지만 사건이 사건인지라 호출된 이승호 교수가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김경 감과 민 경위가 보는 가운데 부검이 이루어졌다. 이승호 교수는 스칼펠을 들고 황 도치의 오른쪽 어깨에서 흉골 있는 데까지 Y자로 절개하고 가위로 갈비뼈를 자르기 시작했다.
"우선 겉으로 보이는 자상은 상복부의 한 군데 하복부에 2군데이고 등 쪽에 한 군데가 있습니다. 왼쪽 허벅지에도 자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심각한 정도는 아닙니다."
"어떤 것이 치명상이었나요?"
"상복부의 자상이 위장을 뚫었고 뒤에서 들어온 칼이 간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결국 과다출혈도 죽은 거죠."
이승호 교수는 능숙하게 심장을 꺼내 무게를 달고 이어 허파도 끄집어냈다. 허파는 생각보다 깨끗한 편이었다. 황도 치는 담배를 안 피웠다. 나름 자신의 관리가 철저했던 인물이다.
"사망시각은 김경 감이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잘 알 테고 황도 치를 죽인 사람은 전문 가였을 겁니다. 칼을 찌를 때 내장에 심각한 상처를 입힐 만큼 전문가였는데 어떻게 조금씩 틀어서 피하긴 했네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김경감은 민 경위를 보며. "민 경위 부검 마치면 부검 보고서 가지고 사무실로 들어가. 난 잠깐 어디 좀 들렸다 갈게."
"예 선배님 알겠습니다."
김경감은 차를 끊고 광화문 쪽으로 향했다. 룸미러로 뒤에서 따라오는 차가 없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조금 돌아가면서 광화문으로 갔다. 광화문 근처에 주차한 김경감은 차문을 닫고 열쇠로 잠갔다. 4번 출구로 내려간 김경감은 28번 락커 앞에 섰다. 그냥 평범한 다른 물품 보관함과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그냥 락커다. 열쇠를 넣고 돌리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봉투가 두개 있었다. 주변을 살피면서 봉투를 꺼낸 김경감은 조용하지만 빠르게 출구로 이동하여 자신의 차로 갔다. 차를 몰고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움직인다음 차 안의 조명을 키고 봉투 하나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조직도 비슷한 것과 리스트들이 있었고 이름과 옆에는 돈으로 보이는 숫자와 현금화하는 방법들이 쓰여 있었다. 다른 봉투 하나를 열자 그 속에는 무기명 채권이 들어 있었다. 10억짜리가 50장, 50억짜리가 50장, 100억짜리가 30장...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대체 이 돈은 어디서 흘러나온 것인가? 위험하다는 경고등이 머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욕심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우선 이걸 숨겨야 한다. 그다음에 박서장과 상의해야 한다. 계속 가야 할지 아니면 잘 마무리하던지. 그런데 이런 걸 아는 나를 그냥 놔둘까? 우선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곳으로 숨기기 위해 차를 이동시켰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어디 있을까. 은행 같은 곳도 위험하다. 우리팀원은 모두 믿을 수가 있는것인가. 돈문제가 얽히면 문제는 상상이상으로 복잡해진다. 게다가 이정도 금액은 본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