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21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호텔방에서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슈트의 단추를 끼우고 있었다. 나갈 채비를 모두 끝낸 남자는 테이블에 있던 시계를 손목에 찼다. 그 남자의 손목을 장식하고 있는 시계는 프랑스어로 음악을 뜻하는 카리용이다. 카리용 중 그랑 소네리 워치는 15분마다 자동으로 소리를 내서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보통 같은 해머로 같은 음을 연속해 내기 힘들지만 카리용은 가능하다. 조금 길고 경쾌하면서 긴 소절의 멜로디가 시계에서 울려나오자 침대에 있던 여자가 눈을 떴다.
"오빠 벌써 45분이야?" 큰 눈에 긴 속눈썹, 위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는 물방울과 같은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이불 위로 드러났다. 남자는 아무 말없이 슈트를 밑으로 쓸어내린 다음 돌아서서 여자를 쳐다봤다.
"있다가 박기사가 집에 태워다 줄 거야. 가서 쉬어. 그리고 CF건은 말해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빠 조금 더 있다 가면 안돼?"
"투정 부리지 말고."
"그런데 오빠 그 옷 입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잘 어울려. 그거 브리오니 정장이지?"
"네가 브리오니를 알아?"
"그럼 007에서 피어스 브로스 넌이 입어서 유명해진 거잖아."
"그거 때문에 유명해진 게 아니라 그전에도 많이 입었어. 머 대단한 거라고."
"오빠가 입은 게 2000만 원이나 하는 건데.. 나 같은 연예인도 쉽게 못 입는 거라고."
"왜? 옷 한 벌 사줘?"
"오빠는.. 난 돈이나 CF모델 그런 거 때문에 오빠 보는 게 아냐. 그냥 오빠가 좋다고."
"알았어 난 먼저 나간다."
"다음에 언제 봐?"
"전화할게."
호텔방의 방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서 남자가 깍듯이 인사하면서 다가왔다.
"최 회장님 아래에 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김실장 면세점 입찰건은 문제없지?"
"예 문제없습니다."
"알았어 내려가자. 그리고 재 이번 CF건 하고 떼어내."
"알겠습니다."
남자는 호텔 문을 나설 때까지 아무 말없이 걸었다. 남자는 앞에 세워져 있던 검은색 고급 세단 앞까지 걸어가자 앞에 서있던 기사가 뒷문을 열어주었다. 뒷좌석에 타자 기사는 앞으로 뛰어가 운전석에 올라탔고 김실장은 조수석에 탔다.
"김실장! 김광용 고검장에게 연락 넣어봐."
"예 알겠습니다." 김실장은 전화를 들고 번호를 누르고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 거 건너편에서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김광용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실장입니다."
"아~ 김실장 어쩐일이야."
"저희 회장님이 연락을 넣으라고 해서요."
"아 그래 바꿔줘." 김실장이 전화기를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회장님 김광용입니다."
"많이 바쁘신가?"
"아닙니다. 일이야 부장검사 밑에 검사들이 하는 거니까요.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나요?"
"돈도 썩어요. 김 고검장. 무슨 말인지 알죠?"
"그거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수배 내렸으니 금방 잡힐 겁니다."
"18년이에요. 18년.. 대체 검찰에서 뭐하는 거야.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이 이렇게 무능했나?"
"아닙니다. 곧 해결될 겁니다."
"김 고검장님 먹으면 체할까 봐. 조금씩 받아먹는 콩고물 가지고 만족하시겠어요? 이제 회사 오셔서 고문도 하시고 사장도 해보셔야지."
"재벌이라고 해서 돈이 안 아까운 게 아냐. 모든 돈에 대가가 있어요. 돈 오래 두면 상합니다. 돈이 상할 때 혼자만 상하지 않아 돈을 만졌던 사람들도 같이 상해."
"이번에 해결될 겁니다."
"그 가족들은 왜 다 그 모양이야. 아비란 놈도 그렇고 여편네랑 이번에는 그 아들까지 세트로 속을 썩이네. 내가 알아낼 때까지 그 경찰 놈 사형시키지 말라니까."
"저희는 내려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IMF로 인해 그때 뒤숭숭했었는데 국면전환용으로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결정한 것이라 어쩔 수 없었던 거 잘 아시잖아요."
"아무튼 우리 잘 합시다. 묵혀둔 덕분에 1조 가 넘었어요." 말을 끝낸 남자는 상대방 말을 듣기도 전에 김실장에게 폰을 건네주었다. "김실장 그때 일 잘한다는 애들 있지? 그 애들 좀 불러봐."
"예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기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못 찾으면 그거 날아간다."
"살려서 잡아야 되겠죠?"
"그럼 죽은 놈한테 말하게 만들 재주 있어?"
아빠한테 상담을 해볼까?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이내 포기했다. 부모님과 상의해본다고 해서 해결책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고 오히려 위험한 일에 말려들지 말라고 반대할 것 같았다. 대학 다닐 때 나를 짝사랑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졸업한 뒤 바로 경찰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지금 대한민국 자칭 1호 탐정 생활을 하고 있다. 그 선배라면 나를 도와줄지 모른다.
"엄소윤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림보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생각의 문을 하나씩 닫고 나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2초? 쯤 걸린 거 같다. "예 과장님."
"정신 좀 차리고 이 파일 좀 살펴봐봐."
"죄송합니다."
"요 며칠 엄 대리 좀 이상해."
"프로젝트에는 지장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엄 대리가 일 하나는 똑소리 나게 하잖아. 믿어."
이런 일을 회사를 다니면서 같이 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웠다. 이번 프로젝트 보고서만 완료되면 휴가를 내야 할 듯하다. 점심 때 만나기로 했던 그 선배한테 우선 현 오빠 일좀 부탁해야 할 듯하다. 소윤은 만나기로 한 레스토랑 시간 맞춰 먼저 나가 있었다. 멀리서 스타일리시하게 옷을 차려입은 훤칠한 키의 남자 한 명이 소윤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집에 여유가 있었던 선배는 경찰일이 취미라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었다. 태권도 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을 딴 덕분에 순경으로 특채가 된 선배는 순경으로 출근하는 그날 BMW를 타고 나갔다. 선배가 가까이 오자 예전과 똑같이 뺀질뺀질한 얼굴이 먼저 들어온다. 환하게 웃으면서 슈트의 앞 단추를 풀고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소윤이 오래간만에 보니까 기분이 좋은데? 어쩐 일이야 오빠한테 도움도 요청하고 말야. 그것도 요즘 아주 Hot사건을 들고 웬일이야."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프니까 선배까지 더하지 마."
"그런데 소윤이 언제부터 형사들의 에스코트까지 받았어? 여기 오는데 두 명이 보이는데?"
"어떻게 알았어?"
"나도 형사 했잖아. 지금이야 탐정 나부랭이 일을 하고 있지만 말야."
"그런데 한국에서 탐정이 합법은 아니지 않아?"
"이제 합법화될 거야.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다가 그런 남자친구를 만난 거야?"
"그거 말해봐야 말만 길어지니까. 뭐 먹을래? 맛있는 거 사줄게."
"비싼 거 먹어도 되는 거지?"
"어차피 오빠한테 수고비 줄 거에서 깔 테니까. 마음대로 먹어."
"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부탁하는 사람 같지 않은데?"
"시간당 단가 계산해서 보내 줄테니까."
"또 우리 사이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암튼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소윤은 손을 들어 아르바이트생을 불렀다.
"여기 점심 특선 코스 요리 있죠? 이 거주세요."
"나 아직 메뉴도 안정했거든?"
"그냥 이거 먹어. 혹시 조사 좀 해봤어?"
"본격적으로는 하지 않았는데 1997년에 사건이 발생하고 잡힌 다음 기소, 사형선고까지 내려진 것이 너무 빨랐던 것은 사실이야. 해볼만 하긴 한데... 먼가 위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리고 그 현? 아니 현철인가 그 어머니가 죽은 것도 무언가 켕기는 것도 있고."잠시 손을 들어 말하는 것을 중단시킨 후 손을 들어 아르바이트생을 불렀다. 아르바이트생이 옆에 다가오자.
"여기 메뉴판 좀 다시 주실래요?"
"예 가져다 드릴게요." 아르바이트생이 가져온 메뉴판을 다시 쳐다보던 소윤은 가방에서 봉투 같은 것을 하나 꺼내서 몰래 끼워놓고 선배에게 내밀었다.
"뭐야? 더 시킬 것이 있어? 코스요리면 배부르지 않을까?" 선배는 메뉴판을 열어보자 그 안에 봉투가 하나 있었다. 조용하게 봉투를 밑으로 꺼내서 슈트 안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우선 착수금 300 넣었어. 그리고 그 쪽지는 한 번 살펴보고."
"돈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우리 사이가 이런 사이 아니잖아."
"선배 집안이 여유 있는 것은 잘 알지만 줄 것 줘야지 마음이 편해. 그리고 위험수당이라고 생각해."
"참내 남자친구를 위해 선배는 좀 다치거나 머 그래도 좋다? 머 그런 거야? 안 본 사이에 참 사악해졌네."
"주변에서 잔머리 좀 잘 돌아가고 몸좀 날래면서 이쪽을 잘 아는 사람이 선배뿐이 없어서 그래. 이해해줘." 말하는 사이 아르바이트생이 수프와 샐러드를 가지고 왔다. 고소해 보이는 빵과 소스도 같이 곁들여서 테이블에 세팅이 되었다.
"알았어. 부담 없이 받을게. 우선 먹자.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잖아."
이 둘을 지키던 형사 둘은 레스토랑 밖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들고 먹으면서 안을 주시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 중 반은 커피잔을 모두 한 손에 들고 있다고 보일만큼 많았다. 요즘 1리터짜리 커피도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한국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데... 하루에 5잔 정도 마시면 암도 예방을 한다고 한다.
"선배님 이게 뭡니까. 식대 좀 지원해달라고 하면 안돼요?"
"야 인마 점심 식대로 한 끼에 십만 원이 넘는 비용 청구했다가 무슨 욕을 들어먹으려고."
"중요한 용의자라면 그 정도 지원해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저 여자 용의자냐? 여자친구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현상금도 2억 원으로 올랐다고 들었는데요."
"그만 떠들고 잘 지켜보기나 해. 저 년 또 어디로 튈지도 몰라. 그리고 저 남자 신상 따야 하는 거 아냐?"
"우선 사진은 찍었는데요. 제대로 나온 사진이 없어요. 그리고 이쪽에서 잘 보이지도 않고요."
"분명히 일부러 이 레스토랑으로 자리 잡고 예약도 저년이 했을 거야. 아 생각할수록 짜증 난단 말이야. 하필이면 예약하기도 힘들다는 이 레스토랑에 저 안쪽 자리는 보이지도 않아. "
"그런데요 선배님 이상하지 않아요? 이토록 확실한 증거도 있고 거의 확실한 범인이라고 언론에서도 떠드는데 저런 여자가 남자친구를 위해 뛰어다닌다게 상식적이지 않아서요."
"씨발 까라면 까는 거야. 무언가 잘했나 보지. 있잖아 여자가 좋아하는 거 그런 거 참 잘했나 보지. 아무튼 저 남자 누군지 조사해봐. 필요하면 임의동행도 요구하고 말야."
"예 알겠습니다."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던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형사 생활 10년이 넘었지만 저런 여자는 처음이다. 범죄경력이 있어서 잘 도망치고 발뺌하는 여자는 봤어도 멀쩡하게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 살인을 저지른 남자를 위해 형사들을 골탕 먹이는 여자라. 삼재인가? 일이 안 풀리려니 이렇게 엿같이 상황이 꼬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