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머물렀던 서산 객사
손님이라고 하면 무언가 대우를 해주어야 할 것 같고 잘해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족을 손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항상 하던 대로 해주면 되니까 부담이 덜하지만 손님에게는 다르다. 손님이 머무는 집이라는 의미의 객사는 조선시대에 가장 정성을 들여서 지은 건물이기도 하다. 보통 중앙정부에서 관리가 내려가서 묵었던 지방의 객사들은 편하면서도 쾌적하게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서산의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이 자리한 곳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른 곳과 의미가 다른 객사가 있다. 바로 태종대왕이 충녕대군을 데리고 와서 묵었던 서산 객사가 남아 있다. 떠 있는 사찰이라는 이름의 부석사가 있는 도비산에 강무를 하기 위해 군사훈련차 들렸다가 묵었던 곳이다.
서산은 깊숙한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곳이어서 왜구가 자주 찾아와서 친절하게(?) 물건을 자주 강탈해가던 곳으로 태종은 이곳의 지형을 보고 방어기지로 사용할 해미읍성을 축조할 생각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이 3일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객사는 고을의 수령이 임금의 궐패를 모시고 삭망에 대소 관원들이 모여 배례를 올리던 곳이다. 조정의 칙사가 오면 이곳에 유숙하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고, 지방 고관이 부임하면 먼저 이곳에 들러 배례를 올린다.
객사에서 사는 집사다. 한자의 형태를 보면 땅을 판 구덩이 위에 지붕을 덮은 집의 형상으로 중간 부분은 집의 덮개를 지탱하는 기둥을 표시하고 있다. 지금의 아파트는 기둥을 명확하게 인식하기 힘들지만 옛날의 건물들은 기둥이 받치고 있는 형태를 명확하게 표현했다.
집을 의미하는 객사이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집과는 다르다. 객사(客舍), 관사(官舍), 교사(校舍)로 쓰이며 사람이 임시로 머무는 집으로 살림은 하지 않는다. 축사의 사도 같은 한자를 사용한다.
우리의 한옥은 처마가 상당히 중요하다. 비가 오든 오지 않든 간에 처마는 조용히 우리 인간에게 자연의 경이로움을 알려주는데 내리쬐는 햇빛이 뜨거운 여름철에는 햇빛을 막아주고 추운 겨울날의 아침에는 방 안 깊숙이까지 햇볕이 들어오게 해 준다. 한옥은 여름과 겨울 해의 고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만들어진 처마의 미학이 있다.
정면 8칸, 측면 2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의 서산 객사의 평면 구성은 중앙 3칸에 정청을 만들어 국왕의 궐패(闕牌)를 봉안하는 장소로 하고, 우측에는 1칸씩의 온돌방과 작은 대청을, 그리고 좌측으로는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대청을 만들어 관찰사나 사신 또는 귀빈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지붕틀은 기둥 사이에 대들보와 종보을 걸고 있는 5량 가구로 건축양식은 전형적인 무출목(無出目) 초익공으로 공포를 짰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1994년부터 1995년에 걸쳐 객사를 정비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