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온도

회덕현의 큰 배움터 회덕향교

대전에 처음 왔을 때 본 지역이 바로 회덕이었다. 당시 수도권에 있다가 내려와서 그런지 회덕이라는 동네는 그냥 시골 그 자체였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도 참으로 촌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그 텃세란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지금같이 학교폭력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자신들끼리만 어울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현재는 회덕이라고 부를만한 지역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역사를 보고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회덕이라는 동네가 대전의 중심이며 유학의 고장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문화가 없어진 것일까란 의구심도 들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배움의 온도로만 볼 때 대전의 평균보다 낮은 지역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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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때에는 우술군, 신라 때에는 비풍군, 고려 때에는 회덕현·유성현·진잠현에 속했다가 조선시대에는 공주목하의 회덕현·진잠현으로 큰 변동 없이 계속되어오다 고종 32년(1895) 지방행정 제도의 개편으로 회덕군·진잠군일때만 하더라도 회덕은 신탄진의 길목에 있는 작은 지역이 아니었다. 대전 IC에서 신탄진의 대부분을 포괄할 정도로 넓은 지역이 모두 회덕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지금으로 보자면 두 개의 구를 하나로 합칠 정도로 넓은 공간인 것이다. 게다가 은진 송 씨를 비롯하여 광산 김 씨 등의 명문가들도 집성촌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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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도 온도가 있다면 아마 공부하고 싶다는 열정일 것이다. 배움의 온도가 있다면 공평하고 효율적인 교육시스템이 적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과 기회, 정보에 따라 배움의 온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차별이 생긴다면 그 사회가 바람직한 것인가. 그래서 향교의 입구 홍살문 앞에 오면 대인이나 소인이나 말에서 내려서 들어가라고 말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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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경계까지 30리이고, 서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문의현(文義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20리라고 말하는 지역이 회덕현(懷德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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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덕향교는 지금 읍내동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의 끝에 있다. 2019년도 전통문화시민강좌가 11월 28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서 4시까지 이루어진다. 이 행사는 대전광역시 문화유산과 에서 진행을 한다. 회덕향교회관 3층 강의실에 가면 강좌를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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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관리하시는 분이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밝게 밝힌다는 지역에 맞게 이곳에 사는 선비는 무릇 제사하는 법이 모두 예경(禮經)을 좇았으며, 또 가절(佳節)을 당하면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고 손을 맞이하여 혹은 시를 읊고 혹은 노래하여 향당(鄕堂)과의 즐거움을 흡족히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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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고택에 가면 항상 보는 문구다. 입춘대길과 건양다경이다. 회덕(懷德) 사는 황군(黃君)은 길인(吉人)이라 이른다. 본래 자상(慈祥)한 마음 품어 여러 사람 구제할 길 생각했고, 항상 측은한 마음 간직하여 인(仁)을 베풀기를 즐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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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부패해서 냄새나는 것 이외는 모두 생기가 발랄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결코 억제하거나 저지할 수가 없다고 한다. 배움의 온도가 높은 사람 역시 그런 생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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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먼저 보인다. 회덕향교를 지키는 개들인지 몰라도 회덕향교를 돌아보는 내내 계속 따라다닌다. 회덕향교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했던 성씨는 송 씨가 아닐까. 과거 회덕현 지역(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일대)의 `송촌(宋村),` `윗 송촌(相宋村),` `아랫 송촌(下宋村)`은 그 한자표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송씨네 마을`을 의미하므로 자연스레 회덕 은진 송 씨(恩津宋氏)라는 성씨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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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까지 열려 있다. 회덕의 이름은 논어 이인편의 '대인회덕 소인회토'(大人懷德 小人懷土·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고향을 품는다)라는 말을 인용해 생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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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남선공원에 가면 명학소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망이망소이난을 기념하는 탑인데 회덕지역에서도 난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1862년(철종 13년) 5월 12일 삼남지방의 민란에 영향을 받아 봉기한 농민군은 억울한 일을 호소하기 위해 관아로 몰려가서 현감 김낙균을 욕보이고, 평소 원한이 있던 부정한 지방관리 이서와 부호의 집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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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사람은 흥망과 성쇠로 절개를 고치지 않고, 의로운 사람은 보존과 멸망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 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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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현을 모시고 그 생각을 기리는 공간이 바로 대성전이다. 옛 사람들은 배움의 온도를 생기가 없는 붓과 먹과 종이, 벼루로 표현했다. 한순간 붓과 먹과 종이와 벼루를 가지고 자신의 감정을 토하고 생각을 내뱉고, 마음을 풀어내듯이 글을 써 내려간다. 생각이 없던 물건이 별안간 생동하는 물건으로 만드는 것이 글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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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노을은 진사처럼 붉고 저녁노을은 석류꽃처럼 붉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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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개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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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릴때 배움의 온도는 자신이 느끼기 힘들게 달아오르고 식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서 찾아오는 배움의 온도는 그 온도가 어느정도에 이르는지 느낄 수 있다. 조절도 가능하지만 어떻게 하면 끝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회덕향교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처음 지었으나,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짓고 순조 12년(1812)에 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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