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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6. 2019

남이섬이 6억 원?

우리는 친일 청산이 되었을까.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100주년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서 15년 만에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 축사가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일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1945년 독립을 하고 나서 74년이 흘렀다. 예전 세대로 치면 2세대이며 요즘처럼 평균수명이 늘어난 시대에는 2세대가 아닐 듯하다. 친일행적을 하며 재산을 일군 사람들의 자손들은 일본 vs 한국의 프레임으로 흘러가는 것이 무척 반가울 것이다. 일제강점기 불법적으로 한반도를 점유한 잘못은 모두 일본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반갑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할 때 적극적인 조선인들의 도움이 없다면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십수 년 만에 한반도를 모두 강제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는 한반도의 모든 지역을 속속들이 알고 점령하는 것은 헌병대를 모두 파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할 때 적극적으로 강점을 도운 지배계층이 있었고 그 아래서 움직이는 2단계 지배계층인 지역 행정가들과 먹고살기 위해서 그들에게 협력해야 한다는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제 강점이 완성된 1910년 전국의 군수 중 단 한 명만이 스스로 자결했으며 그 누구도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지금처럼 반일을 외치지 않았다. 


지금 No Japan을 외치고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한국의 주권과 한국인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모든 잘못이 일본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는 바람직하지 않다. 만약 일본 아니 아베에게 잘못을 묻고 싶다면 친일행적을 한 사람들 혹은 그것을 기반으로 기득권에 올라서 있는 모든 한국인에게 잘못도 함께 물어야 한다. 만약 그런 개념을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개국할 때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그 국가에 편입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하면 어쩔 수 없다. 


문제는 통일신라, 고려, 조선이 개국되었을 때 왕족(주로 성씨) 등과 관계된 혹은 당시 기득권이 힘을 잃어버린 반면 대부분의 백성들을 물건으로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은 합병 당시 조선인들은 철저하게 사용하고 버려질 물건처럼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물건이기에 반인 간 적인 행위를 해도 일을 시키고 돈을 주지 않아도 성욕을 풀 수 있는 대상으로 삼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건 합법과 비합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힘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다. 한국이 일본보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지고 최강대국 미국과 가장 협상력이 강한 국가가 되었을 때가 아니라면 용서를 구하기가 힘들다. 


한국이 그만큼 강해질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가능은 하지만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하나로 되는 그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기에 친일청산을 너무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역사인식이 낮기 때문이다.  법원은 지난달 남이섬을 친일재산이라고 보도한 언론사가 법원 판결로 관련 문구를 삭제하게 되었다. 


"1972년 당시 남이섬 매입가격은 1610만원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를 지난해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억1105만원 정도인 바 당시까지 민씨가 쌓아온 사회적 경력과 이에 수반해 축적됐을 것으로 보이는 자력을 고려하면 민씨가 스스로 구입 가능했을 금액으로 보인다"


필자 역시 남이섬을 가본 기억이 있다. 그 넓은 땅에 다양한 시설과 공간이 있었다. 1965년 수재 민병도 선생(1916~2006)이 토지를 매입, 모래뿐인 불모지에 다양한 수종의 육림을 시작하였다는데 땅을 사기에도 엄청나게 벅찼을텐데(불가능해보이지만 한푼안쓰고 모으고 투자도 신의 손처럼 했다고 치자) 투자까지 한다. 하나의 소생태계가 존재할 수 있을 정도의 지역이었다. 남이섬이 2018년 추정 가격 6억 원이라면 필자는 달러 빛을 내서라도 그 땅을 매입할 것이다. 문제는 남이섬의 매입한 사람이 민병도라는 사람인 것이다. 친일로 한반도를 팔아넘기는데 큰 공로(?)를 세운 민영휘의 후손이다. 


자 역사적인 사실을 짚고 넘어가 보자. 민영휘라는 이름에서 추정할 수 있듯이 명성황후와 친인척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인 그는  조선 말기에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육군부장, 헌병대 사령관, 표훈원 총재, 신경봉공회 고문, 정우회(政友會) 총재 등을 지내며 일제강점기에 화려한 세월을 보낸다.  1928년 7월 일본 정부가 주는 금배(金杯)를 받았고, 11월에는 은배(銀杯)와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던 그는 1933년 무렵 30만 원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거부였다. 


희한한 것은 왜 남이장군의 묘가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데 가묘를 사용하고 남이장군을 스토리텔링에 활용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건릉이 있는 화성에도 글을 쓰기에 남이장군의 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10년 전에 남이섬을 갔을 때는 남이섬의 남이가 그 남이장군을 이야기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남이장군은 이순신 장군이나 김시민 장군과 같이 충무공의 시호를 붙인 사람이다. 그만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남이섬(법인이기에 친일후손 같은 색채는 희석이 된다.)은 15일 경북 영주시에서 열린 광복 74주년 기념행사에 국내 대표 관광지 자격으로 참석해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되새겼다고 밝히기도 했다. 


No Japan을 외치고 싶다면 그것이 깊이 있는 행동과 방향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본 여행을 좋아하고 일본의 장인 마인드를 누구보다도 칭찬하는 필자다. 한국인을 믿고 싶어 하고 그 저력을 인정하고 싶지만 매번 실망했었다. 한일 축구전에서만 흥분하는 한국인, 이유 없이 일본을 싫어하는 한국인, 친일청산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국인, 역사인식이 왜 중요한지 모르는 한국인이 아닌 나아가는 한국인이 강한 한국을 만들 수 있다. 이러다 말겠지란 생각을 하다가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란 희망을 걸어본다. 


단돈 6억 원(현재가치)으로 남이섬을 살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려준 법원의 그 현명함(?)에 감탄을 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나라를 팔고 지역을 팔고 이권을 챙기며 자신의 주머니를 채운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자애로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달라졌을까. 그들은 광복이 되면서 일본이 언젠가는 한반도를 지배해주겠지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광복이 올지 몰랐으니까라고 말한 어떤 매국노의 말처럼 말이다. 


너그럽게 생각해서 남이섬이 친일재산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넓은 땅을 어떻게 6억에 살 수 있었을까. 대체 그 방법을 모르겠지만 아마 이렇게 물어보면 당시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섬에 불과했다고 말할 것이다. 반역을 하면 3족을 멸하던 조선시대의 그 전통(?)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혀 개별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국인이라면 이 땅에 살고 있다면 그 유산이라고 의심이 될 수도 있다면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No Japan을 외치며 일본 여행을 가지 않을 정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친일로 인해 수많은 재산을 일군 사람들의 후손의 관광지나 그 상품을 가지도 구입하지도 않아야 한다. 남이섬은 필자의 동창 가족과 함께 갔던 곳이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뭐 그렇게 흘러가니까. 그냥 가고 보고 사진 찍었을 뿐이다. 일본을 막연하게 배쳑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힘을 기르면서 배척의 균형을 가져야 할 때다. 그리고 내부의 적을 청산하지 않으면 그 미래는 불투명하다. 


가장 큰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No Japan은 No Minami를 넘어선 생각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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