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05-5

2015.11.24

"오빤 이 정도까지 나를 믿어?"

소윤이의 이야기를 들은 현은 소윤을 한 번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쥐고 있던 커피의 향을 맡았다. 커피의 향은 고소한 것도 아닌 시큼한 것도 아닌 그런 묘한 냄새가 공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기분에 따라 매일 마시던 커피 향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이 방법뿐이 없을 것 같아."

"그냥 이 돈 가지고 해외로 나갈까?"

"그러면 행복할 수 있을까. 이걸 발견한 이상 아버지 사건도 내 사건도 모두 진실이라는 것이 증명은 되었잖아. 우리 끝까지 가보자."

"그럼 같이 하자. 오빠 혼자 경찰서로 가서 자수한다고 해서 일이 잘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잖아."

"우리가 세운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내가 들어가서 시선을 분산시켜야 해. 그리고 최악의 경우는 Plan C 같은 것은 없어. Plan Z야. 내 생각하지 말고 소윤이 안전을 먼저 생각해봐."

"몰라 나는 자신 없어. 이 정도 돈을 감당할 자신도 없고."

현은 소윤의 두 손을 잡으면서 스윽하고 소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눈을 마주쳤다.

"세 가지 중에 어떤 것이 현실적 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돈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야. 경찰서로 가게 되면 어차피 그 부분을 추궁할 테니까 내가 알지 못하면 말할 수도 없는 거잖아."

"그런데 다시 생각해봐. 이 돈이 있더라도 그들을 상대할 수 있겠어? 오빠야 억울하겠지만 지금의 상황보다 더 안 좋아진다면 어떻게 할 거야?"

"뭐 흔히 말하는 정의 구현 같은 건 아냐. 내가 한국 국민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 진실이라는 것 정도는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뭐가 달라져?"

"조금은 아주 조금은 세상이 좋아지지 않을까. 30년을 넘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소윤이는 잘은 모를 거야. 이해하기도 힘들 거고. 그런데 누군가가 안 가는 길을 한 발을 내딛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지금 이것이 보상인 것이 아닐까. 아니 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계획을 현실화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어. 그리고 오빠 그 안에서 버틸 수 있겠어? 변호사라도 있고? 국선 변호사가 제대로 변호해줄 수 있겠어?"

"변호사는 걱정하지 마 생각해둔 사람이 있으니까."

"알았어. 오빠 그렇게 해볼게."

"그런데 도와줄 믿을만한 사람은 있어?"

"응 있어. 뺀질거리기는 하지만 믿을 만할 것 같기는 해."


어릴 때 아버지와 낚시를 적지 않게 다닌 기억이 있다. 물고기를 잡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아들과의 대화를 하기 위한 방법으로 낚시를 선택했던 것 같다. 어릴 때의 기억으로 아버지는 좋은 말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했다는 말이다.


"고요히 자기를 들여다볼 시간을 가지지 않으면 목표가 빗나가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아인슈타인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아버지가 하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커서는 이해했다. 진실되게 혼자를 만나는 시간이 없다면 나를 알 수 없다. 내 인생에 있어서 내가 원하지 않은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닥친 순간도 있었고 안개가 일어나 내 앞을 가득 메워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 섬에서 불어오는 아련한 향기가 느껴졌다. 진짜 섬백리향의 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섬백리향의 향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는 밤섬은 아버지와 가끔 가는 낚시터이기도 했다. 초등학생이 되면서 처음 가본 밤 섬은 도심 속의 새로운 느낌을 부여하던 곳이었다. 난 그전까지 바다에만 섬이 있는지 알았는데 한강 한 복판에 섬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해 준 밤섬. 그곳에 처음 간 날 절벽이라고 부를만한 유일한 한 곳에 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23일 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가 한강변에 내리기 시작했다. 겨우 구한 2인승 보트가 소윤과 현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걸로 저기까지 갈 수 있긴 한 거야?"

"500m가 채 안 되는 거리야. 갈만할 거야. "

주변을 몰래 살펴보면서 소윤이 보트 앞에 탔다. 현은 보트를 밀면서 보트 뒤에 조용하게 올라탔다. 노를 저어서 밤섬까지 가는 한강의 물결은 잔잔하기만 했다. 보트를 마련하기까지는 했지만 그곳에 아버지가 말한 것이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밤섬에 도착한 현과 소윤은 보트를 밤섬 기슭에 끌어다 놓고 조심스럽게 수풀을 헤치면서 들어갔다. 1999년에 사람의 진입이 금지되면서 이곳은 철새와 동물들의 배설물이 쌓여 있었다. 어두운 밤에 조그마한 플래시에 의지하면서 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길은 길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오빠 이런 곳에 와서 낚시를 했다는 거야?"

"응 그때는 들어올 수 있었어."

"얼마나 가야 하는 거야?"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여기서 그나마 높은 곳이거든."


아버지는 이곳을 나를 데리고 걸어가며 물어본 것이 있다. "옛날에 그림에 미친 고호도 있고 음악에 미친 베토벤도 있었어. 그런데 현철이는 무엇에 미치고 싶어?" 난 미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은 몰랐지만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난 사진에 미치고 싶어." "사진? 그것도 좋겠다. 현철이만의 의미가 있겠지. 나중에 알겠지만 미치는 것 중에 가장 위험한 것이 사람에게 미치는 거야. 모든 것이 사람에서 시작하고 사람에서 끝나는 거야."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알았어."


수풀을 헤치면서 그 장소에 도착한 현과 소윤은 나무 주변을 헤치면서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10분쯤 주변 땅을 나뭇가지와 가져온 조그마한 삽으로 파면서 찾았던 것 같다. 소윤의 삽 끝에 걸리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고요한 밤섬의 공기를 갈랐다. 날카로운 쇳소리에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던 철새들이 날아갔다. 사과박스 반만 한 크기의 철상자를 꺼낸 현과 소윤은 철상자를 열려고 했으나 입구에는 숫자로 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자물쇠가 걸려 있는 것을 본 소윤과 현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오빠 번호 알 거 같아?"

"잠깐만. 그 앞에 번호가 뭐라고 했지?"

"무슨 번호? 아? 그거 말하는 거구나. 여기 쪽지 있어. 293665101166."

"65 숫자 뒤에는 페이지를 의미했잖아. 그러면 앞에 2936이 아닐까?"

소윤은 자물쇠의 숫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2.. 9.. 3.. 마지막 숫자 6을 맞춘 순간 자물쇠 열쇠가 열렸다. 그 안에는 봉투 하나가 있었다. 현과 소윤은 떨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생소한 무기명 채권이 가득 들어있었다.

10억짜리가 50장, 50억짜리가 50장, 100억짜리가 30장. 상상하기도 힘든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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