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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17. 2020

교육 지향

옥천의 이지당

오랫동안 조선왕조가 장기 지속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지배체제가 공고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식, 종교, 정치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조선의 의례는 양반이 관장하였으며 그 정점에는 국왕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재지사족의 자치기구인 유황소가 향촌사회를 지배하였다. 지역마다 인재를 배출한 곳에는 오래된 고택이 남아 있다. 옥천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리한 옥천 이지당도 그런 곳이다.

옥천은 정지용이라는 시인의 흔적이 워낙 강한 곳이어서 역사적인 공간이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대전 대덕구 회덕과 가까운 곳이기에 옥천에도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송시열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01년(광무 5) 옥천 옥각리(玉覺里) 금씨(琴氏)·이 씨(李氏)·조 씨(趙氏)·안 씨(安氏)의 네 문중에서 이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이지당은 송시열(宋時烈)과 조헌(趙憲)이 지방의 영재를 모아 강론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라고 한다. 

주차공간에서 데크길로 걸어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석축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 팔작집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쪽 2칸은 거실로 되어 있는  층루건축물(層樓建築物)이 나온다. 

대청에는 조헌의 친필인 각신 서당의 현판을 비롯하여 이지당기(二止堂記)·이지당강학조약(二止堂講學條約)·조헌의 친필운(親筆韻) 등이 남아 있는 이지당에는  송시열의 친필인 이지당의 편액이 걸려 있다. 

국가의 모든 것은 균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권력의 중앙집중은 중앙과 지방의 심각한 격차를 가져왔고 지방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적 모순의 해결을 지방으로 미루거나 방치하기도 한다.  

본채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 팔작집으로 높은 단 위에 누마루를 두고 주변에 난간을 두르고 있다. 

고산앙지경행행지(高山仰止景行行止)라는 이지당의 근원을 찾아가면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는 의미다. 송시열은 대전 우암 공원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조헌은 금산에 가면 칠백의총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조헌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승병(僧兵)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였으나 금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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