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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지향

옥천의 이지당

오랫동안 조선왕조가 장기 지속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지배체제가 공고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식, 종교, 정치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조선의 의례는 양반이 관장하였으며 그 정점에는 국왕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재지사족의 자치기구인 유황소가 향촌사회를 지배하였다. 지역마다 인재를 배출한 곳에는 오래된 고택이 남아 있다. 옥천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리한 옥천 이지당도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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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은 정지용이라는 시인의 흔적이 워낙 강한 곳이어서 역사적인 공간이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대전 대덕구 회덕과 가까운 곳이기에 옥천에도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송시열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01년(광무 5) 옥천 옥각리(玉覺里) 금씨(琴氏)·이 씨(李氏)·조 씨(趙氏)·안 씨(安氏)의 네 문중에서 이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이지당은 송시열(宋時烈)과 조헌(趙憲)이 지방의 영재를 모아 강론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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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공간에서 데크길로 걸어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석축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 팔작집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쪽 2칸은 거실로 되어 있는 층루건축물(層樓建築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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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에는 조헌의 친필인 각신 서당의 현판을 비롯하여 이지당기(二止堂記)·이지당강학조약(二止堂講學條約)·조헌의 친필운(親筆韻) 등이 남아 있는 이지당에는 송시열의 친필인 이지당의 편액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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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모든 것은 균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권력의 중앙집중은 중앙과 지방의 심각한 격차를 가져왔고 지방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적 모순의 해결을 지방으로 미루거나 방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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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채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 팔작집으로 높은 단 위에 누마루를 두고 주변에 난간을 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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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앙지경행행지(高山仰止景行行止)라는 이지당의 근원을 찾아가면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는 의미다. 송시열은 대전 우암 공원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조헌은 금산에 가면 칠백의총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조헌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승병(僧兵)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였으나 금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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