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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姓氏)

대청호에 자리한 여흥민씨

후손을 만드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가능하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성씨가 있다. 성씨에서 성(姓) 은 아버지의 출신을 의미하며 부계 혈통과 씨(氏)는 어머니의 출신으로 모계 혈통이 합쳐진 것이다. 지금은 철저하게 그 특징을 따르지는 않지만 보통은 성과 본관은 가문을,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세대까지 확인할 수 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형배를 보며 최익현이 촌수를 계산할 때도 거론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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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의 주변길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여러 성씨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수몰되면서 그 흔적까지 없어져서 도로 주변으로 옛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 대청호의 마을에는 여흥민씨도 적지 않게 모여 살았다고 한다. 여흥민씨운촌공묘역도 있으며 종갓집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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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이 등장한 성씨 중에 여흥 민 씨가 있었다. 여흥민씨(驪興閔氏)는 고려시대 상의봉어(尙衣奉御)를 지낸 민칭도(閔稱道)를 시조로 하는데 가문의 위세를 떨칠 때 조선왕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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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세워져 있는 비는 조선 인조 때 울산부사를 지내고 예조판서로 증직 했던 여흥민씨 운촌공의 비라고 한다. 여흥민씨는 조선역사에서 적지 않은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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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민씨중 인현왕후의 동생인 민진원(閔鎭遠)은 1691년(숙종 17) 문과에 급제한 뒤 영조 대까지 병조정랑·사복 시정(司僕寺正)·전라관찰사·우의정·좌의정·판중추부사를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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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민치록(閔致祿)은 딸이 고종의 비가 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민치록의 딸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 대립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청호 생태습지를 가로지르는 데크길의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가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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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민씨의 묘역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삼정마을이 나온다. 대청호 로하스길의 도로변에는 여흥민씨 집의공파 종갓집이 있다. 경기도 여주에서 살았던 민후식이 여주에서 이주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다가 이곳에 다시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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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갓집은 가운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 구조로 전면은 ㅡ형 행랑채, 후면은 ㄱ형 안채로 되어 있다. 여흥민씨 집의공파는 앞서 말한 인현왕후와 명성왕후를 비롯하여 순명효황후등 잘 알려진 여흥민씨의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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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혈족 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성의 분화와 같이 본관도 후대에 내려올수록 분관·분 적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봉군지(封君地)·사관지(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성씨가 마을을 이루며 살 때 보통 집성촌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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