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생 균형을 말하다.

타협은 치사한 것이 아니다.

수진 : 너희들은 유학자 하면 어떤 생각이 들어?

주만 : 고리타분한 것을 연구하는 사람.

진수 : 당파싸움이 생각나는데.

소희 : 그 시대의 지성인.

성현 : 공자를 따르며 그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을 연구하는 사람.

소윤 : 그 시대가 원하는 것이나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명분을 만드는 사람.

수진 : 개개인의 입장에서 모두 맞는 말 같은데. 오늘 우리가 갈 곳이 계룡시에 있는 사계 김장생 고택이잖아. 그래서 유학자에 대해서 물어본 거야.

성현 :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자와 유학자를 구분 못하잖아.

진수 : 그래 그 부분은 나도 항상 헷갈리는 부분이었어. 똑같은 선비儒를 사용하면서 어떤 이는 유자라 칭하고 어떤 이는 유학자라고 칭하잖아.

수진 : 삼국시대쯤 혹은 그 이전에 들어와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큰 줄기는 유학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고 유자는 순자가 세운 개념이라고 봐야겠지. 순자는 욕망을 인정하고 그걸 잘 컨트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며 신분제도에 대한 생각도 좀 유연했었어.

성현 : 그런데 반해 공자의 유학은 서열 중심의 계급사회를 만드는데 적당했었지. 그 유학이 변질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여성은 밖에 나가면 안 되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다고 고착화돼버린 거지.

소희 : 순자의 생각은 어떻게 보면 장 폴 샤르트르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 샤르트르의 철학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자유가 있다.'라고 말했으니까. 신분의 제약이 따르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자유도 초기부터 제약이 생기는 거니까.

소윤 : 그래서 사계 김장생이 어떤 사람인데요.

수진 : 사계 김장생은 논산에서 많은 후학을 양성해낸 중요한 인물이야. 윤선거뿐이 아니라 아들이었던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윤증 등 많은 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어. 게다가 류성룡과도 친분이 있었던 사람이거든

진수 : 임진왜란 때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류성룡.

소윤 : 아 그 시대 인물이었군요. 학문의 깊이가 대단했나 보네요. 그런데 사계라는 호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화무쌍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인가요?

성현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렇지는 않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가면 사계천(沙溪川)이 있는데 그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어.

주만 : 지명에서 유래해서 호를 정했다는 거야? 그럼 고택 앞으로 사계천이 흐르고 있나?


MG0A5652_resize.JPG 사계 김장생 고택 (충남 계룡시 두마면 사계로 122-4)

수진 : 저 고택 앞으로 사계천이 흐르지는 않고 사계천이 흐르는 곳에는 돈암서원이라는 사액서원이 건립된 적이 있어. 지금은 조금 옮겨 지어졌지만 서원 규모나 역사로만으로 본다면 국내에서 손꼽힐 만 한 곳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성현 : 돈암서원에는 외삼문, 산앙루, 응도당, 정회당, 장판각, 양성당, 동재, 서재, 사당이 있고 응도당은 보물로까지 지정되기까지 했어. 우리 언제 시간이 되면 가보자. 진수에게는 건축공부를 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진수 : 한 번 가봐야 되겠네.

소희 : 대문에 사계고택이라도 현판에 적혀 있네.

성현 : 다시 고택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명재 윤증 고택만큼 유명세가 있지는 않지만 보다시피 김장생 고택은 그 규모가 작지 않아. 안채, 사랑채, 안사랑채, 곳간채, 광채, 문간채, 행랑채 등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 안 해도 알겠지?

주만 : 지금도 이 정도 규모면 위세가 대단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조선의 가장 큰 문제는 양반들에게 있었던 것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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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윤 : 그건 생각 차이 아니에요? 조선시대에는 관리가 학자이자 정치인이었잖아요. 지금도 정치인들이 문제지 누가 문제예요. 지금은 학자와 정치인이 분리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정치계로 진출도 하는 것을 보면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수진 : 맞아! 소윤이 말대로 그렇게 본다면 지금 시대 역시 조선과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어. 고시 출신, 대기업 임원 등이 지금의 기득권을 이루고 있고 상당수 그 기득권은 정관계에 이어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잖아.

소희 : 그렇지! 문제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바른 생각을 가지고 시대를 이끌었느냐를 봐야 한다고 생각해.

성현 : 사계 김장생이 활동하던 시기는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 분당하고 대립하던 시절이었는데 이때 예의 실천 방법으로 개인의 수신을 강조하고 계구 신독을 중시하였던 사람으로 예에 맞게 행하여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강조했던 사람이 바로 사계 김장생이야.

진수 : 그렇게 본다면 그런 정신이 지금 시대에 더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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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 : 김장생은 구봉 송익필, 율곡 이이, 우계 성혼에게 예학과 성리학을 배우고 그의 혼과 정신은 후학들에게 전해졌다. 그에게 배운 아들 김집, 송시열, 송준길 네 사람이 18현(東方十八賢)으로 뽑혀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가 되었다.


소희 : 지금 시대는 철학이 사라진 시대라고 할까. 과거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가지만 그 철학이나 인생관보다 는 기능적인 것과 취업을 위한 배움만 있잖아.

진수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데에는 그만큼 떳떳한 삶이 되어야 된다는 의미는 아닌지 생각하게 되네.

소윤 : 그래도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이야기할 때 당파 싸움을 빼놓을 수가 없긴 해요.

주만 : 맞아. 보면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무슨 사화 같은 것을 일으켜서 죽이는 일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어.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죽일 필요까지 있었을까?

성현 : 그건 조선왕조는 지금 같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봉건시대이기 때문이야. 봉건적 계층 사회에서는 지금과 달리 누군가와 의견이 다를 때 자신의 세력 확보를 위해 죽일 수도 있었어. 지금 대통령이 정치인이나 각료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죄도 없는데 마음대로 죽일 수 있나? 못하겠지 정치적인 생명을 끝내거나 그 자리에서 내쫓는 것도 생각만큼 쉽지가 않잖아.

소윤 : 그러네요. 조선시대에 국왕들은 자신의 역린을 건드렸다고 해서 죽이기까지 했으니까요.

수진 : 소윤아 왕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반대파에서 타당한 명분을 만들어주었을 때 가능했었어. 왕이 마음대로 결정을 내려 결국 쫓겨난 연산군이 있잖아. 명분이 없으면 쉽지 않아.

소희 : 한국은 유럽의 국가들에 비해 봉건제도가 꽤 늦게까지 유지되긴 했지. 세계는 이미 변화하고 있었는데 조선은 그 흐름을 못 느낀 것이라고 볼 수 있어. 프랑스나 독일, 영국에서도 조선과 유사한 봉건제도가 있었어. 조선에서 관리들에게 농지를 하사한 것과 같이 유럽의 국왕들도 영주에게 땅을 내렸는데 그것이 장원과 비슷한 개념이네. 그곳에서 경작을 하는 농민은 경작지에 경작을 하는 대신 영주에게 세금을 바친 거지. 조선의 농노와 비슷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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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 : 그런데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은 일찍이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조선보다 빨리 강국으로 발돋움해서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졌잖아.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 했고. 결국에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합병이 된 거잖아.

수진 : 조선 역시 그런 흐름이 있었어. 평등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반란도 있었지만 소수에 의해 주도되었기에 대부분 실패했지만 정조라는 국왕이 주도해서 시대의 변화를 주도한 적이 있어. 알다시피 정조의 사후에 모든 것은 원상태로 돌아갔고 이후 어떠한 변화도 없이 조선 말기까지 간 거야.

성현 : 주제가 너무 벗어난 것 같은데 다시 당파 이야기로 돌아가면 임진왜란 직전에 동인과 서인이 일본을 다녀와서 서로 상반된 주장을 했던 것은 알 꺼야.

주만 : 맞아. 나도 TV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어. 당파싸움으로 김성일이 그런 말만 안 했으면 그 정도로 밀리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거든.

수진 : 맞아. 그 영향이 아주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 그러나 그것보다 기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문화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측면이 컸거든. 기껏해야 노략질이나 하는 오랑캐라고 생각한 거지. 아무튼 김장생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우기도 했던 인물이야.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이 분당하여 대립하던 시절이었어.

소희 : 일본에 대한 몰이해가 두 번에 걸친 왜란을 불러온 거네.

성현 : 김장생의 예학은 임진왜란 이후에 더욱더 주목을 받았어. 율곡 이이를 잇는 기호학파의 중심이 되었는데 선조 이후에 영남학파의 다수가 동인이 되면서 경기도와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세력이 결집했고 특히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세력이 급속히 확장되었거든. 지금으로 말하면 집권 여당이 된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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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윤 : 아하.. 서인이 집권을 하게 될 때 김장생도 중심에 있었군요. 그런데 나중에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지 않나요? 당파싸움의 결과로 사도세자가 죽은 걸로 아는데...

수진 : 사도세자의 죽음에 단적으로 당파싸움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 우선 넘어가고 사계 김장생은 서인이었지만 비교적 중도를 지켰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 그의 학문은 파평 윤씨와 광산 김씨, 대전 회덕에 자리 잡은 은진 송씨 에게로 이어진 거야.

진수 : 어찌 보면 대단한 사람이네. 예학이 무엇인지 다시금 새겨보고 조금은 알 거 같아.

소희 :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다른 타인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니야. 그 사람만의 인생관이 있을 수 있거든. 서로 생각이 다르면 얼마나 배척하는지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누구와 이야기할 때 정치, 종교를 언급하지 말라고 할 정도면 서로의 견해를 듣지 않으려는 속성이 반영된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소윤 : 알겠네요.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것 그것이 중요한 거 같아요. 저도 제 생각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봐야겠어요.

소희 : 내가 말하는 것은 꼭 다른 사람의 말에 너무 신경을 쓰라던가 그 사람의 말에 너무 제약을 받으라는 소리는 아니야.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건 소윤이의 몫이 아닌 온전히 상대방의 몫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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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 : 대청마루에 앉아서 이렇게 이야기해보는 것도 얼마만이야. 다른 사람의 말을 존중하되 휩쓸리지는 마라.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주만 : 오래간만에 수육에 막걸리 어때 좋은 집 하나 알아놨는데 말야.

수진 : 그래 그러자.


사계 김장생은 1548년 7월 8일 한성에서 태어나 1631년 8월 3일 논산에서 그 생을 마감했다. 조선의 유학자인 김장생은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다.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지내다가 조정의 주요 요직을 거쳤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던 그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윤증 등 많은 학자들을 길러냈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 되었다가 다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사상은 언제나 대립을 통해 성립해왔다. - 엘렌 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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