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지성 최치원

얼마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857년에 태어났지만 사망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다. 신라 말기 3최의 한 사람으로 868년(경문왕 8)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데 이때의 나이가 12살이었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 만인 874년에 빈공과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인 문장가의 길을 걷는다. 그가 당나라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바로 878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았는데 이때 <토황소격 討黃巢檄>을 썼는데 이 때문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주만 : 보령에 오면 회 한 접시를 우선하는 것이 예의 아니야? 왜 유적지를 먼저 간다고 그러는 거야.

소희 :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니까 최고운 유적지나 먼저 갔다 가자.

소윤 : 그런데 최치원은 전국에 많은 흔적을 남긴 것 같아요. 저번에 산청에 갔을 때도 본 기억이 있어요.

수진 : 그건 최치원이 40여 세의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 전국을 유랑하면서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이야. 전국에 경치가 괜찮다는 곳은 모두 돌아다녔으니까.

진수 :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나 자신의 꿈을 펴보지는 못했다 정도는 알고 있는데 당시 귀족세력이 그렇게 힘이 강했었나.

성현 : 지금도 정권 말기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거의 천년에 가까운 신라 말기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거지. 진골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온갖 문제를 일으켰는데 수진이는 알겠지만 당시 신라의 왕족이었던 김헌창이 난을 일으켰다가 웅진성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그시기가 최치원과 35년 차이뿐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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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윤 : 그럼 최치원이 살았던 시기에 왕건이나 견훤, 궁예 같은 사람도 살았었던 거예요?

수진 : 응 동시대 인물이라고 봐야지. 신라의 귀족 시대를 마감하고 본격적으로 호족 시대를 열었던 사람들이니까.

주만 : 그런데 난 왜 최치원과 궁예 같은 사람과 시기상으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지.

성현 : 수진아 그런데 최치원도 어떻게 보면 기득권에 가까웠던 사람이잖아. 대산군, 천령군, 부성군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기도 했고 6두품의 최고의 관등인 아찬에까지 올라갔으니까 말야. 그런데 굳이 바꿀 필요까지 있었을까.

수진 : 알다시피 894년에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책 10여 조가 반영되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 사회 모순을 외면했던 진골귀족들과 신라 왕실에게 실망감을 느끼고 떠난 거니까.

진수 : 성현이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거 아냐. 그냥 적당하게 잘 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세상을 등질 필요까지 있었냐를 말하고 싶은 거지. 지금으로 말하면 지자체장 정도까지는 되는 거니까.

소희 :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잖아.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어.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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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윤 :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어설프게 알고 평가하려고 들지 마라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주만 : 그런데 이곳이 섬이야? 보리 섬이라고 쓰여있네.

진수 : 응 이곳은 원래 섬이었는데 남포 제방이 놓이기 전까지는 이곳은 말 그대로 섬이었다가 제방이 놓이고 나서 육지로 변했대.

수진 : 신라 말의 혼란기에 세상을 비관하고 전국을 유랑할 때 이곳 보리 섬과 성주사를 왕래하여 경치를 즐기면서 시를 짓고 수학하면서 이곳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어.

소희 : 그런데 시는 보이지 않네.

성현 : 시간이 오래되면서 바닷바람에 풍화되어서 없어진 거야.

진수 : 봐봐.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심층 풍화로 인해 수직절리가 생긴 게 보이지? 예리하게 절리면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달걀 껍데기처럼 벗겨지는 박리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모두 풍화의 흔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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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 : 아까 말했듯이 궁예나 왕건, 견훤과 동시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에 나와있는데 고려 왕건에게 보낸 서한 중에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결국 고려가 새로운 왕조로 자리 잡을 것을 예측했다고는 하나 실제 보냈는지 사실은 확인되지는 않았어.

소윤 : 배운 것이 아까웠을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그렇잖아요. 자신이 노력한 만큼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 같은 거요.

소희 : 최치원은 멸망의 길에 들어선 신라에 백약이 무효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세상을 유랑 다니면서 세월을 보낸 거구. 최치원 선생이 지었다는 추야 우 중이라는 시를 보니까 확 와닿네.


"가을바람에 애써 시 읊지만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

창 밖에는 밤 깊도록 비 오는 소리

등불 아래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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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만 : 유랑 다녔다면 언제 죽었는지 아는 사람도 없겠네.

수진 : 응 태어난 해는 아는데 사망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 그냥 그가 지은 <신라 수창 군호 국성 팔각 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 말까지 생존했던 것은 분명 하대. 여기 보령뿐만이 아니라 해운대, 쌍계사, 합천, 강주 등 전국에 최치원의 발자취가 남아 있긴 해.

소윤 : 그럼 50대 초반까지만 행적을 알 수 있다는 거네요. 그 후로 어떻게 되었대요?

성현 :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많이 알려진 속설은 신선이 되었다는 거야.

진수 : 그게 차라리 낫겠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전국을 유랑하다 신선이 된 지식인.

수진 :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해. 후삼국중 한 세력에 의탁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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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황 격 소문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쳤던 고운 최치원 선생은 고국인 신라로 돌아와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려고 했으나 진골 세력에 막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유교 사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했던 그의 대표적인 것으로 ≪제왕 연대력 帝王年代曆≫이 있으며 신라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성립된 향가 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그는 풍수지리설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숭 복사 비문>에 의하면, 예언적인 도참 신앙(圖讖信仰)과 결부되어 국토재 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후인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해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다음 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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