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먼저 보낸 공주의 삶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 (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와 정빈 이씨 (靖嬪 李氏, 1694~1721) 사이에서 태어난 화순옹주는 조선의 왕녀들 중 유일하게 열녀로 지정되어 있다. 1732년 (영조 8)에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의 아들인 월성위 김한신과 혼례를 치르고 행복하게 살았으나 1758년 김한신이 불과 39세의 나이에 세상을 더나고 그 죽음을 애도하며 곡기를 끊은지 14일 만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주만 : 정말 춥다. 올겨울 가장 추울 때라더니 정말 춥긴하네. 여기가 화순옹주 열녀문이라는거야?
수진 : 응 이 곳이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를 기리며 정조가 세운 화순옹주 옹문이야. 열녀 문인 거지.
소희 : 난 조선시대의 열녀라는 개념은 강요된 이미지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
성현 : 그런 관점이 조선시대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도 열녀라는 개념과 남편의 사후에도 죽을 때까지 정조를 지켜야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친 적이 있거든.
소윤 : 저도 소희 언니의 생각에 공감해요.
주만 : 한 사람만 지고지순하게 섬기고 시부모를 공양한 것이 열녀인 것은 맞지 않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수진 : 그건 성리학적인 관점에서나 그렇지. 그리고 그 생각의 이면에는 남자는 귀하고 여성은 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는 셈이지.
진수 : 다들 열기 좀 식히고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평등한 것이 좋긴 하지. 그런데 건물이 남아 있지는 않네.
성현 : 정조가 1783년에 화순옹주 옹문을 세우긴 했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어. 그리고 좌측에 보면 그 둘이 합장된 월성위 김한신 묘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상태야.
주만 : 영조의 딸이라면 혹시 영화 사도에서 나온 사도세자의 딸 아니야? 사도세자에게 이것저것 조언하던 당찬 여자아이 말야.
수진 : 그건 화완옹주고 사도세자와 화순옹주는 15살 차이야. 화순옹주가 15년 먼저 태어났어.
진수 : 조금 헷갈릴 수도 있겠다. 화완, 화순
성현 : 영조의 딸은 총 8명이 있었는데 화억옹주,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령옹주, 화길옹주라고 부르고 있어.
주만 : 정말 자식 많았다.
소윤 : 그럼 화순옹주가 열녀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네요.
수진 : 조선 왕실에서 유일하게 열녀라고 칭해진 사람이 화순옹주인데 남편 김한신과 12살의 나이에 결혼하여 살다가 김한신이 3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곡기를 끊고 14일 만에 따라 죽었어.
소희 : 사람이 배고픈 것은 못 참는 건데 그걸로 생명의 끈을 끊은거 아냐.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을까.
주만 : 하루만 굶어도 미칠 것 같던데. 무려 14일 동안이라 상상도 안 간다.
소희 :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화순옹주 역시 인생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닐?. 그런데 철학자인 알베르 까뮈는 "삶은 의미가 없을 때 훨씬 더 잘 살 수 있다."라고 말했어.
소윤 : 어렵네요. 그거 하나 만으로 화순옹주가 그랬던 것은 아닐 거예요.
성현 : 소윤이 말대로 대부분의 일들은 한 번에 일어나지 않아. 우선 화순옹주의 어릴 때로 돌아가 보면 영조와 후궁인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화순옹주는 사실 둘째 딸인데 장녀라고 보기도 하거든. 화순옹주의 언니가 태어난지 얼마 안돼서 세상을 떠나고 오빠인 효장세자 역시 왕세자로 책봉되고 난 뒤 9살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게다가 화순옹주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고 이듬해 병으로 죽었어. 그녀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아버지인 영조뿐이 없었던 거지. 그런데 조선의 왕은 할 일이 많아 바빴으니까 사실 그녀를 보살필 사람은 궁인들밖에 없었을 거야.
진수 : 어떻게 보면 고아나 다름이 없었던 거네. 물론 주변에 사람은 많겠지만 말야.
소윤 : 그럼 남편이었다는 김한신은 어떤 사람이에요?
수진 : 김한신은 아버지가 영의정 김홍경으로 당파로 보면 노론이었어. 한마디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지. 김한신은 화순옹주랑 결혼하면서 부마가 된 거지. 그 위세가 대단했지만 항상 자신을 낮추고 비단옷보다는 소박하게 입고 총명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어.
진수 : 노론이었다고? 그럼 사도세자와는 사이가 안 좋았을 거 같은데.
소희 : 맞아. 사도세자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론이었잖아.
수진 : 그래 영조의 딸들 대부분이 노론 가문과 혼인했으니까. 사도세자의 불안이 극에 달할 때 매부들을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거든.
소윤 : 사도세자도 정말 외로웠겠어요.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가문도 노론이고 자신의 혈육인 누나와 동생들의 사돈 가문이 노론이었다면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도 되잖아요.
소희 : 고립된다는 것은 사람을 정말 힘들게 만들지.
성현 : 영조가 참 많은 자식을 두었지만 아들은 단 두 명뿐이었어. 9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와 뒤주에 갇혀 죽게 한 사도세자. 그런데 영조 역시 정말 많은 노력을 했지만 정작 자신을 끊임없이 공격했었던 소론과 남인의 그림자에서 못 번어난거지. 그리고 그 어두운 이면이 그대로 자식들에게 전이되었을 가능성도 컸을 거야.
주만 : 어두운 이면이 전이된다고?
진수 : 우울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떤 고정관념 혹은 과도하게 자신의 가치관을 따라오길 원하는 거지. 그런 거 있잖아. 부모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경향이 있잖아. 그것이 가정에 비극을 초래한 사례도 있는데 왕실이라고 해서 그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거지.
수진 : 월성위 김한신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를 조선왕조실록(43집)에는 다만 "김한신이 卒하였다…어찌 한 병으로 효험이 없을 것을 뜻하였겠는가"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런데 앞서서 말한 것처럼 당파는 노론이었지만 그것에 너무 치우치지 않았대. 참고로 김한신은 조선의 명필이라는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야.
소윤 : 진짜요?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영조도 장수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가족사로 보면 행복한 삶을 살았다라고 보기는 조금 애매하네요.
성현 : 영조 역시 인간이었던 거지.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그를 잃게 된 주된 요인이 소론과 남인에게 있다고 굳게 믿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 남인과 소론 일파는 궁녀인 순정을 이용해 정빈 이씨와 효장세자를 저주하였고 화순옹주 역시 홍역에 걸렸을 때 순정이 몰래 독약을 먹여 죽이려 했거든.
진수 : 그런데 화순옹주와 김한신 사이에는 자식은 없었던 거야?
수진 : 불행히도 없었어. 있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 모르지. 지금도 약간 그런 분위기가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자가 시집와서 자식을 못 낳는다는 것은 큰 문제처럼 생각되었거든. 소박맞는다고 하잖아. 사회 분위기를 지금과 비교하면 곤란해. 아마 그런 압박은 상상을 초월했을 거야.
소희 : 그런데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에서 태어난 사람이잖아.
진수 :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 압박이라기보다 왕실에서 태어나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한 허함이 아니었을까. 굳이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것을 찾을 수 없는 거지.
소윤 :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이유가 꼭 있어야 하나요?
성현 :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어. 인간은 상당히 복잡한 생각을 가진 존재야. 아마 화순옹주 역시 그런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지 않았을까. 자신의 혈육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궁궐에서 자신을 보살펴주는 궁인조차 자신을 해하려 했던 경험을 했는데 그나마 자신과 의지하며 살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 기분은 우리가 상상하기는 힘들 거야.
수진 : 성현이 말대로 우리가 화순옹주의 선택을 단적으로 말하기는 힘들것 같아. 아무튼 화순옹주가 죽기로 마음먹고 곡기를 끊었을 때 아버지인 영조가 체면 같은 것을 버리고 미음을 먹으라고 했는데 화순옹주는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했는데 영조는 그걸 불효라고 생각하고 열녀문 내리길 거부했어.
소윤 : 정말 슬프네요. 자식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입장.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아버지가 딸의 임종을 지키려고 할 때 '그 누구도 자식의 죽음을 먼저 볼 이유가 없다'라고 말이에요.
주만 : 흥미로운 이야기야. 춥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 `
진수 : 그래 가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통해 노론 일파의 당색을 조정하여 이미지 쇄신을 노렸으나 뿌리 깊게 박혀 있던 트라우마를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남편이 죽고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화순옹주가 1758년에 세상을 떠나고 불과 4년 뒤인 1762년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