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과 삼천궁녀
부소산성 :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산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부소산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가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 중심으로 약 700m의 테뫼형 산성이 있는데 50 ×50㎝, 70 ×60㎝의 백제시대 초석이 발견되었다. 지금도 이곳은 부여에서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당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이곳에서 비경을 즐겼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소윤 : 부소산은 그렇게 높지는 않네요. 산행이라기보다는 산책할 수 있는 공간 같아요.
성현 : 높이가 106m밖에 안되니까. 그냥 마을 뒷산 같은 곳이지. 이래 봬도 부여의 진산(鎭山)이었어. 이쪽으로 올라가는 방향에 있는 것이 달을 보내는 송월대(送月臺)라 부르고 동쪽이 달을 맞이하는 영월대(迎月臺)야.
주만 : 이곳이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곳이지?
수진 : 그건 후대 통일신라에서 사기를 썼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모두가 궁녀라기보다는 궁궐에서 일하는 궁인들을 모두 포함한 수라고 봐야겠지.
소희 : 의자왕이 원래 총명한 군주였다고 알고 있는데 태자 때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도 불렸던 사람이잖아. 신라의 입장에서는 망할만하니까 망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했으니까.
진수 : 신라나 백제 모두 한반도에 있었으니 같은 민족끼리 싸움이다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 시각으로 보면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야 될 것 같긴 해.
수진 : 의자왕은 중앙으로 권력이 정리가 된 후 642년 7월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 성(城)을 빼앗았으며, 8월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가는 요충지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켰으니까. 신라는 당나라에 손을 벌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절실했겠지.
소윤 : 이쪽으로 올라가면 낙화암 쪽으로 가는 길이죠?
성현 : 응 이쪽으로 걸어올라 가면 송월 대가 나오고 거기서 부소산 북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절벽이 나오는데 그곳이 낙화암이야. 낙화암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고란사가 나와.
진수 : 사람들도 없고 좋긴 하네. 눈길을 걸어보는 느낌도 괜찮고 말이야.
수진 : 역사책에서는 간단하게 나오지만 오랜 기간 당나라나 신라가 준비한 것을 알 수 있어.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인데 6년 전에 당이 백제 정벌을 준비한 기록이 있거든.
소희 :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신라를 공격하기 직전에 붉은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 오합사)로 들어가 울면서 불당을 돌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나라의 기운이 점점 다해갔던 것 같긴 해.
주만 : 그런데 사비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소 산성하고 상관이 없는 건가?
성현 : 지금 부여군의 읍내지역이 사비성이 있고 북쪽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 부소산성, 남쪽을 방어하는 것이 성흥산성, 좀 떨어진 동쪽에는 노성산성, 조금 더 동북쪽으로 올라가 보면 공산성이 있지. 실제 660년에 사비성이 포위당했을 때 공주에 있는 웅진성으로 후퇴해서 재기를 노리긴 했는데 실패한 셈이지.
진수 : 왜 실패한 거야? 공산성은 지난번에 가봐서 알겠지만 방어하기에 좋은 공간이잖아.
수진 : 사비성에 있었던 둘째 아들 부여태(扶餘泰)와 손자 부여 문사(扶餘文思)와의 사이에 알력이 생겨서 무너졌는데 항상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하잖아.
소희 : 의자왕이 초기에는 정치적 역량을 크게 발휘했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향락에 빠져서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잖아.
성현 : 그런데 다들 알겠지만 백제의 상감 기술만 보더라도 상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 그리고 한반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라고 볼 수 있는 전라도, 충청도가 모두 백제의 영역에 있었고 말이야. 알다시피 르네상스의 화려함도 막강한 후원을 통해서 만들어진 거니까. 의자왕의 향락은 든든해진 곳간 덕분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말년에 정세를 잘못 판단한 것은 사실이긴 하지.
소윤 : 고대국가에서 왕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죠. 그래서 쿠르트 레빈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잖아요. "자신의 운명이 전체 집단의 운영에 얼마나 크게 좌우되는지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집단의 번영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몫의 책임을 떠맏으려 할 것이다."
진수 : 으흠..소윤이의 말은 의자왕이 조금 더 책임의식을 가졌으면 좋았을 것이다라는 거네.
수진 : 여기가 부소산의 정상이야. 저 건물은 떠오르는 달을 보며 즐겼다는 영월 대가 있던 자리인데 원래의 영월대는 없고 1964년 부여군 흥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관아 문루를 옳겨놓고 '영일루'라고 부르고 있어.
주만 : 정상이라고 해봤자 얼마 안 올라오네. 이 정도 산이라면 산책 삼아 매일 올 수도 있겠다.
성현 : 부소산성에는 옛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낙화암, 고란사, 반월루, 영일루, 사자루, 군창지, 문지, 삼충사 등 빠르게 돌아보면 한 시간 반, 여유 있게 돌아보면 2~3시간 정도 걸리지.
소윤 : 눈 내리고 오니까 더 괜찮은 것 같아요.
사비도성 : 북조의 낙양성을 벤치 마킹해 만든 도시로 금강의 지류인 백마강을 자연 해자 삼고 부소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해 성벽을 쌓는 나성 건축의 형태를 띠고 있는 앞선 고대도시다. 해자는 도성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만큼 방어 완충지 역할을 해준다. 자연이 아닌 인공적으로 해자를 만든 대표적인 사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주했던 오사카성을 들 수 있다.
소희 : 여기가 그 유명한 낙화암이네.
주만 : 3,000명이나 되는 궁녀가 뛰어내리기에는 물이 얕은 거 같은데.
수진 : 말 그대로 꽃이 떨어졌다고 해서 낙화암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궁녀와 궁인 등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떨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소윤 : 그래요. 당시 사비도성에는 3,000명이나 되는 궁녀가 기거할 마땅한 공간도 없었다는 말도 있던데요.
소희 : 그래도 여기서 바라보는 백마강의 풍광이 참 좋다. 이곳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백제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을까?
성현 : 의자왕이 처음에는 총명하여 당나라까지 이름을 떨쳤으나 백제가 멸망할 때 총기가 흐려지고 결국 백제를 패망의 길에 들어서게 하였다는 말은 모두 진실은 아닐 수 있어. 백제가 삼국중 가장 디테일하고 예술 수준이 앞서 나갔던 것은 맞으니까. 먹고살만하니까 예술도 발전하고 각종 음식문화도 발전할 수 있었던 거지. 지금도 전라도 지방의 음식은 전국에서 가장 맛있기로 유명하잖아.
수진 : 백제의 패망을 적은 것이 무려 1,000여 년이 지난 고려시대 삼국사기에 나오니까. 기록도 자세하지 못할 수도 있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적었다고 보기는 힘들 거야.
주만 : 부소산성은 힘들게 올라오지 않아서 괜찮은 곳이네.
수진 : 낙조도 괜찮고 백마강 너머로 황포돛배가 다니는 모습도 어울리네.
소윤 : 의자왕의 아버지가 서동으로 유명한 성왕이죠? 이곳의 기틀을 마련한 백제의 왕.
성현 :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을 이렇게 기록했어. “성왕은 천도와 지리에 신묘하게 통달했다 “ 5부 25항의 행정체계를 구축하고 22 부사를 만든 성왕은 각 지역을 다스리는 왕과 제후의 임기를 5년마다 정해서 임명하기도 했지.
진수 : 백제의 마지막 날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국가가 여기서 그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네.
소윤 : 사람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어야 할 날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주만 : 경치는 좋기는 한데 겨울에 와서 백제의 마지막 날 이야기를 들으니 쓸쓸한 느낌이 드네.
소희 : 그러게. 누가 부소산성을 주제로 백제의 그날을 역사화(畵)로 그려주면 좋겠어. 웅장하면서도 비장한 느낌으로 말이야.
부여 : 부여는 123년 동안 백제의 마지막 왕도로 역할을 한 곳으로 이곳에 흐르는 강은 금강이 아닌 백마강이라고 부른다. 사비로 수도를 옮길 때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부소산은 둘레는 약 2.2km. 해발 106m의 낮은 산이지만 위치상으로 보면 요충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