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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08. 2020

표절사(表節祠)

양지를 모신 청양의 사당

지난 7일 용인에서 지역 확진자가 나왔다고 한다. 이 확진자는 여러 클럽을 전전하면서 화려한 밤을 보냈던 모양이다. 생활 속 거리두기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은 여전히 마음으로 불편하기에 가는 것을 꺼리고 피하는 편이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곳이라면 가지 않고 식사도 친한 지인 1~2명과 가끔 먹는다. 유흥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조금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청양의 한적한 곳을 찾아가고 싶어 졌다. 

청양군 북부에 있는 면으로 면의 동부는 100~500m의 산지를 이루며, 서부에는 법산(459m)·백월산(400m) 줄기가 뻗어 있는 운곡면에 가면 표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사람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곳이다. 이렇게 한적한 곳이 참 마음이 편해지는 계절이다. 이곳에서는 구기자가 많이 생산되며 춘포짜기(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5호)와 전통주 구기자주(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0호)가 전승되고 있는 곳이다. 

때론 안내판을 보면 조금 헷갈릴 때가 있다. 특히 사당 정도의 규모는 눈에 잘 뜨이지 않기 때문에 여러 번 왔다 갔다 할 때가 있다. 언신(彦信), 충민(忠愍) 양지를 모신 사당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삭녕에 와 있던 경기도관찰사 심대(沈岱)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적의 야습을 만나 끝까지 항전하다가 순사(殉死)하였다.

지금 논에는 물대기가 한참인 때이다. 소만을 기다리며 이제 본격적인 농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으로 이 주변에는 주로 다른 작물을 키우기 위해 밭을 뒤집어놓고 곳곳에는 다양한 작물을 키우는 것이 눈에 뜨인다. 

어떻게 돌아다니다 보니 드디어 표절사를 찾았다. 이렇게 안쪽에 있으니 찾는 것이  쉽지가 않다. 표절사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칭찬하며 나라에서 그들의 고향에 세워주던 정려의 성격을 띠고 있다. 입구에는 솟을대문이 있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기단을 만들어놓고 그위에 사당을 세워놓았다. 양지는 죽은 뒤 정조 20년(1796) 이조판서로 증직 되고 충민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본관은 남원이며 적성 현감과 삭녕 군수를 지냈다. 삭녕 하면 잘 모르겠지만 삭녕은 지금의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지역의 옛 지명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전국적으로 표절사는 많이 세워져 있다. 전쟁 등에서 순국한 사람들을 모시는 경우가 많은데 청양에도 표절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번에 처음 찾아와 보았다. 옆에는 민가가 있는데 평온한 하루에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렸다. 

사당의 규모는 정면 세 칸과 측면 한 칸 반의 규모로 작은 규모다. 양지가 임진왜란 때 종사관이라는 관직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종사관은 드라마 등에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여러 군 조직에서 종사관이 있는데 보통은 조선시대 각 군영(軍營) 등에 딸린 주장(主將)을 보좌하던 관직이다. 

바로 옆에 집에서 나오신 할아버지가 필자를 따라오면서 말을 걸으신다.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냐부터 어디에 사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 한적한 곳까지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묻는다. 어쩌다 보니 이곳에 왔다고 말하니 이 마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청양을 많이 다니긴 했지만 구석구석의 마을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들어보지도 못한 마을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요즘의 분위기를 말씀해주셨다. 잘은 모르지만 맞장구를 쳐드리면서 고개만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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