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보 백보

김제 금구면의 금구향교

지금은 국경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다른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은 여러 가지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렇지만 국경이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았던 오래전에는 사람들은 나라라는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다. 특히 중국의 수많은 국가들이 있을 때 백성들이 수가 곧 힘이었기에 공자나 맹자 같은 사상가에게 답을 구하기도 했었다. 양혜왕이라는 사람이 맹자에게 흉년에도 백성을 살폈는데도 불구하고 백성이 늘어나지 않음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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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많은 금이 생산되기도 한 금구면은 평야가 발달한 곳으로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금구산성(전라북도 기념물 제85호)과 금구향교 대성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3호) 등이 있다. 입구에 자리한 만화루 (萬花樓)를 비롯하여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가 남아 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만화루는 2층 누각 형식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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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답을 구한 양혜왕의 말에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질 때 방패를 버리고 도망간 오십 보의 사람과 백보의 사람 중 누가 더 비겁한가에 대해 물었다. 이에 양혜왕은 오십 보를 도망간 사람이나 백보를 도망간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한다. 양혜왕은 자신이 백성에 대한 구휼하는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미끼라는 것을 촌철살인의 풍자로 답해준 것이었다. 따라서 혜왕의 정치 역시 이웃 나라의 폭압적인 왕의 정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오십 보 백보의 차이만이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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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에 자리한 향교뿐만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향교 중에 이렇게 비가 많이 세워져 있는 곳은 많지 않다. 홍살문에서 들어오면 만화루까지 양쪽에 비가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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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김제시의 작은 면이지만 금구면은 전라남도의 중심 행정구역이었던 때가 있었다. 조선시대 흉년과 당파싸움 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이때 금구라는 지역으로 활동했던 사람이 정여립이다. 혈통에 의해 임금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능력이 가진 사람은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으며 세상의 모든 것은 백성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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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향교의 규모가 작지 않은 것을 보면 정여립 모반사건 이전에 금구라는 지역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금구향교는 역사가 오래된 곳으로 고려 후기인 1390년(공양왕 2)에 건립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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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하게 여유 있는 금구향교의 공간이 그 역사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평등과 귀천 없음을 강조하면서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정여립은 결국 왕권을 위협하는 대상으로 진압되며 1천 명이 희생당하는 기축옥사가 발생하게 된다. 그 후 금구현으로 강등되어 김제군에 예속된다. 조선 후기 전라도는 역적의 땅으로 몰리며 크게 등용되지 못하며 벼슬길의 대부분이 막혔다. 그 흐름은 근대역사를 거쳐 지금도 호남지역의 불균형한 발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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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면에서는 전라도 조방장 원신과 전라우도 조방장 김언공이 육지의 야전전투로 왜군을 섬멸시킨 금구전투도 있었으며 농민군을 결집시켜 민족적․계급적 요구를 실현시키고자한 정치적 혁명을 기도했던 시작이 금구에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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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다양한 사건이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역사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으로 정의 혹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정여립의 사상이 전라도 홀대론으로 이어졌고 지금도 그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셀 수 없는 많은 꽃이라는 만화(萬花)의 이름을 사용한 김제향교의 정면 건물처럼 우리는 다양한 생각을 인정해야 하는 시기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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