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으로 숨을 거둔 장태수의 남강정사
국가 또는 개인이 법률에 의거해 제공하는 무상 노동이 부역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부역하면서 대게 영화를 누리던가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고등계 형사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 고문했고,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수도경찰청 간부로 재직하며 일제 부역의 대표인물로는 노덕술이 있다. 노덕술은 고문을 하는 데 있어서 탁월함(?)을 자랑하며 인지도를 올렸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고문방법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상신리에 가면 전라북도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된 초가집의 남강정사가 있다. 이면도로에서 안쪽으로 들어가야 만나볼 수 있는 이 집은 대한제국 말의 충신이었던 장태수가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그의 부친이 지은 것으로 헌종 7년 (1841)에 태어나 철종 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고종대에 벼슬을 하며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누군가를 보호할지 이해를 당췌할 수 없는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속국이 되었을 때 조선의 고위 관리들은 일본의 주요 인사로 관리되었다. 을사 5적은 그 관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장태수는 낙향하여 이곳에 머물게 된다. 일본 천황이 하사하는 은사금을 받으라는 말에 그는 호통을 쳤다.
"비록 나라는 망하였으나 대한의 고위직 신하로 어찌 더러운 돈을 받느냐"
초가집은 참 관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초가지붕과 돌담 위에 짚이 썩기 때문이기도 하다. 1년에 한 번씩은 전체적으로 관리하여 갈아주어야 하지만 기와지붕을 하지 못한 서민들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짚으로 그 수고로움을 대신하는 것이다.
크기가 규격화되어 있지 않아서 명확하게 집의 규모를 재기는 그렇지만 기둥으로 보자면 전체 8칸이 약간 넘는 크기의 아담한 집이다. 이 집은 자연석을 2단 쌓기로 기단을 만든 후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지은 一자형 겹집의 초가이다. 안방의 좌측 칸은 전면이 대청이고 후면은 방이다. 대청의 앞과 옆에 쪽마루가 자리하고 있다.
조용한 시간 속에 최근 위안부 할머니를 지원하는 단체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사람이 가진 속내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는데 전에 관심을 가졌다며 그들의 실체를 좀 더 빠르게 알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조용하게 살던 장태수는 은사금을 받으라며 내려온 일본 헌병이 돌아가자 웃으면서 "이때가 바로 죽을 때다." 하며 단식을 단행하여 27일 만에 순절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