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부역할 수 없다.

단식으로 숨을 거둔 장태수의 남강정사

국가 또는 개인이 법률에 의거해 제공하는 무상 노동이 부역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부역하면서 대게 영화를 누리던가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고등계 형사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 고문했고,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수도경찰청 간부로 재직하며 일제 부역의 대표인물로는 노덕술이 있다. 노덕술은 고문을 하는 데 있어서 탁월함(?)을 자랑하며 인지도를 올렸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고문방법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MG0A5684_resize.JPG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상신리에 가면 전라북도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된 초가집의 남강정사가 있다. 이면도로에서 안쪽으로 들어가야 만나볼 수 있는 이 집은 대한제국 말의 충신이었던 장태수가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그의 부친이 지은 것으로 헌종 7년 (1841)에 태어나 철종 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고종대에 벼슬을 하며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MG0A5687_resize.JPG

누군가를 보호할지 이해를 당췌할 수 없는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속국이 되었을 때 조선의 고위 관리들은 일본의 주요 인사로 관리되었다. 을사 5적은 그 관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장태수는 낙향하여 이곳에 머물게 된다. 일본 천황이 하사하는 은사금을 받으라는 말에 그는 호통을 쳤다.


"비록 나라는 망하였으나 대한의 고위직 신하로 어찌 더러운 돈을 받느냐"

MG0A5690_resize.JPG

초가집은 참 관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초가지붕과 돌담 위에 짚이 썩기 때문이기도 하다. 1년에 한 번씩은 전체적으로 관리하여 갈아주어야 하지만 기와지붕을 하지 못한 서민들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짚으로 그 수고로움을 대신하는 것이다.

MG0A5692_resize.JPG

크기가 규격화되어 있지 않아서 명확하게 집의 규모를 재기는 그렇지만 기둥으로 보자면 전체 8칸이 약간 넘는 크기의 아담한 집이다. 이 집은 자연석을 2단 쌓기로 기단을 만든 후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지은 一자형 겹집의 초가이다. 안방의 좌측 칸은 전면이 대청이고 후면은 방이다. 대청의 앞과 옆에 쪽마루가 자리하고 있다.

MG0A5696_resize.JPG

조용한 시간 속에 최근 위안부 할머니를 지원하는 단체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사람이 가진 속내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는데 전에 관심을 가졌다며 그들의 실체를 좀 더 빠르게 알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조용하게 살던 장태수는 은사금을 받으라며 내려온 일본 헌병이 돌아가자 웃으면서 "이때가 바로 죽을 때다." 하며 단식을 단행하여 27일 만에 순절하게 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로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