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김제의 원평집강소

개인적으로 상당한 시간을 두고 미래를 위해 주식을 사지만 개인투자자를 개미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작은 힘을 가진 존재들이 모인 그런 집단처럼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주식에 투자하는 개인을 보고 동학 개미 운동이라는 붙이는 언론의 의도가 불순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언론의 의도는 기관이나 은행 혹은 펀드를 운영하는 회사에 맡겨야 되는 것처럼 몰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MG0A5714_resize.JPG

금산면이라고 불리는 김제의 한 지역은 충청남도의 금산과는 다른 곳이다. 금산사를 비롯하여 금산교회가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동학농민혁명 원평 집강소가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동학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의 보위와 농민 구제활동을 철저화하려는 정치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MG0A5716_resize.JPG

금산면에 있는 효자 강릉유 공치열 포상을 살펴본다. 집이 가난했지만 부모님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서 봉양하고 지극정성으로 마음과 힘을 다했다고 한다.

MG0A5717_resize.JPG

동학농민운동은 흥선대원군과도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그 역시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화폐의 가치를 절하할 수 있는 당백전을 수없이 발행하고 세금도 가혹하게 걷었다. 윗물이 그럴진대 아랫물인 수령의 횡포는 어떠했을까.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은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MG0A5718_resize.JPG

결국 1893년 12월 농민들은 우선 억울한 사정을 민소(民訴)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 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당시 관리의 잘못을 고하지 못했다. 잘못이 있더라도 고한 사람에게 매질을 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MG0A5721_resize.JPG

결국 동학농민운동의 불씨를 댕겼고 집강소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김제 금산면의 원평 집강소도 그런 곳이었다. 1882년에 4칸의 초가로 지어졌으며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백정 출신 동록개가 원평대접주 김덕명 장군에게‘신분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헌납하였는데 이곳이 다시 복원된 것은 2015년이다.

MG0A5723_resize.JPG

원평 집강소는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민주사회와 평등사회를 지향하고 그것을 실천하였던 곳이다.

MG0A5724_resize.JPG

김제시 원평장터는 1893년 봄에 전라도 농민 1만여 명이 모여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걸고 한 달간 원평취회를 열었던 동학농민혁명의 거점이었고, 김제지역 최초로 3.1만세운동을 일으켰던 곳이다.

MG0A5727_resize.JPG
MG0A5731_resize.JPG

복원된 지 5년이 지난 이곳은 열린 공간이며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평등함의 가치 그리고 누구나 기회가 있으며 특정한 세력들만 높은 곳에 올라서서 보는 농단을 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 동학농민운동의 가치였다. 집강소에서는 동학농민군의 봉건제 개혁요구였던 폐정개혁도 추진하였는데, 그 요강은 이 때까지의 주장이 수정 정리된 12개 조목으로 되어 있다. 패배한 농민군들은 후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환경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