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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08. 2020

금산 용강서원(錦山 龍江書院)

운명은  자초하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만든 재앙은 도망할 곳이 없다는 말이 있다.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허문 뒤에 남이 망가뜨릴 수 있다. 세상의 이치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라고 한다. 단순해 보이는 이치지만 바로바로 보이지 않으니 대충 살게 되고 쌓여서 돌아오게 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모든 것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금강변에 자리한 금산 용강서원은 충남의 문화재를 관리하는 곳에서 나와 정비를 하고 있었다. 잔디를 깎고 서원의 건물을 정비하는 중이었다. 용강서원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42년(1716)에 세워졌으며, 우암 송시열(宋時烈), 동춘 송준길(宋浚吉), 시남 유계(兪棨), 미호 김원행(金元行), 역천 송명흠(宋明欽)의 이야기가 내려온다. 회덕에서 활동한 은진 송 씨의 흔적이 이곳에도 이어진다. 

묻고 답하며 길을 찾는 것이 옛사람들의 교육 방식이었다. 사실 진리가 특별하고 먼 곳에 있다고 여기는 것도 문제지만, 길을 찾으려 들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한다. 

용강서원은 건물이 한 동만 있는데 5칸 규모의 강당이 있는데,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은 좁은 공간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 서원의 확장을 막는다는 구실로 폐쇄되었지만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사 칼끝에 섰을 때 그 정체가 드러난다고 한다. 겉모습과 실제 사이의 소실점, 한계선, 분수령을 잘 살펴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용강서원의 대청마루는 개방감이 있는데 대청의 문을 모두 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좋다. 용강서원이 있는 이곳은 마달피라고도 불리는 곳인데 기병들이 말달리며 무술을 연마하고, 심신을 닦았다고 하여 붙여진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이 부근에서는 의병들이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곳이라고 한다. 

시남 유계는 병자호란 후 한동안 금산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이것이 뒷날 용강서원에 배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호 김원행도 이곳에 배향되었는데 신임사화로 노론 4 대신이었던 김원행의 할아버지 김창집이 사사되면서 그의 집이 바로 이곳 용화리에 있었기에 용강서원에 출입하면서 강론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용강서원의 앞을 흐르는 금강에도 용화리의 짙은 녹음이 그대로 반영되면서 마치 나무가 물에도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든다. 용강서원에서는 고문서 자료가 보존되고 있는데 강학을 위한 용강 서당 문서나 오랜 시간 이곳을 방문했던 방문객 명단인 심원록은 용강서원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by. P.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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