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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0. 2020

철학의 완성

우암 송시열의 관점

살다 보면 그때는 맞았는데 지금은 다르거나 틀릴 때가 있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과학이나 수학에서는 언급될 수 있어도 삶의 철학에서는 변동성이 있다. 유교의 기본과정인 4서라는 대학, 중용, 논어, 맹자는 자주 읽어보았기에 친숙한 책들이다. 이 4서를 확립한 것은 주희라는 사람으로 성리학이 발전하는데 큰 도움을 준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렇기에 조선시대에 유학자라고 하면 주희의 철학적인 관점을 상당히 중요시했다. 

버섯으로 유명한 괴산의 고장 청천면에 가면 우암 송시열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우암 송시열은 주희의 철학적인 관점과 학문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잡았다. 이 관점은 윤휴의 새로운 해석을 공격하게 된 빌미가 되었고 친구이자 사계 김장생의 밑에서 같이 수학했던 윤선거와 그의 아들 윤증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관계로 만들게 된다. 

우암 송시열 신도비는 그의 묘소의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1년 만에 찾아가 본 곳이다. 그렇다면 주희의 삶을 어떠했을까. 그는  만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과감한 직언, 소신 있는 의견, 부패와 사리사욕이 판치는 정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공격 등으로 인해 파면되거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으로 쫓겨나게 된다. 우암 송시열 신도비가 자리한 곳의 바로 옆에는 괴산 청천리 고가가 자리하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후대의 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했으며 확고한 신념은 확실한 족적으로 남아 있다.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유교 교육을 받은 주희는 18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했는데, 당시 그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35세였으니 당대의 수재라고 생각할만하다. 우암 송시열의 생애를 보면 주희와 적지 않게 닮아 있다.  18세기 후반 이후 노론의 일당 전제정치 확립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체계로서 정치와 학문 양 측면에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했었다. 

옆에 자리한 청천리 고가로 들어가 본다. 청천리 고가는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도비 옆에 남아 있는 괴산 청천리 고가는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 사당채 등이 남아 있는데 안채 앞에는 一자 형태로 곳간채가 길게 세워져 있다. 

마침 다른 분들이 하룻밤을 묵고 나갔는지 일하시는 분들이 안을 치우고 있었다.  우암 송시열의 종손들이 6대에 걸쳐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3칸 크기의 대문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여러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고 이들의 철학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던 주희의 사상을 이어간 우암 송시열의 발걸음이 이어진 곳이다. 

군자는 느긋하고 차분하며 뽐내지 않으며 소인은 뽐낼 뿐 여유가 없고 차분하지 않다고 한다. 옛날에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다. 지식은 그런 것이다. 오늘날 배우는 사람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우암 송시열의 흔적을 찾다 보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은 유연했으면 어떠했을까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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