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 야유암 역사유적공원
살면서 한 사람이 만나서 진지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몇 명이나 될까. 아무리 사람을 많이 대면하는 직업이라고 할지라도 그 속까지 알 수 있는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을 읽고 개인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역사가 모두 정사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의미는 사람과 사람의 입에서 회자되고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TV에서 혹은 언론에서 SNS 등에서 등장하는 사람만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과거 속에 있었던 사람이라도 읽힌 사람이라면 현재 살아 있는 것이다.
업으로 역사학자의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전국에 자리한 고운 최치원의 이야기가 있던 곳은 웬만한 사람보다도 많이 가보았다. 문경에도 고운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찰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를 기리는 야유암 역사유적공원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경의 아름다운 사찰 봉암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의 업적을 기릴 뿐만 아니라 주변에 산재한 희양산, 봉암사, 선유동 등 고운 선생과 관련된 유적과 연계하기 위한 곳으로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입구 일대에 최치원 유적(야유암) 역사공원이 22일 준공된 것이 2017년이다.
곳곳에 최치원 선생이 생전 친필로 쓴 가은 봉암사 입구, 경내에 있는 ‘야유암’과 ‘취적대’, ‘명월청풍고산유수’ 등의 석각을 재현해 놓아 두었다. 옛사람들의 대화법을 기록해놓은 책들을 보면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스스로의 배움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방식이 얻는 것이 훨씬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렵게 얻은 것은 오래도록 기억되며 활용도가 높다.
사람을 읽다 보면 그 연결고리를 찾을 때가 있다. 최치원의 삶은 말 그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지만 균형점을 찾았으며 자연 속에서 풍요를 찾아가며 살았다. 지금보다 훨씬 이동수단이 제약적이었던 그때에 오로지 자신의 발로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흔적을 남겼다.
최치원은 글도 많이 썼지만 시도 많이 남겼다. 그 필력이 남다른 것은 익숙히 아는 사실이다. 12세의 나이로 중국 유학을 떠나 약관의 나이에 중국 윤수현의 관리에 올랐던 최치원을 기리는 최치원 기념관이 양조우에 있다. 중국의 시험문제에 최치원이 등장할 정도라고 하니 최치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국보 315호인 지증대사탑비의 재현, 최치원 선생의 친필 석각과 문학작품, 고운 선생의 유허지가 이곳에 있다.
희양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바위는 참 멋스럽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글이라는 것은 때로는 강한 압박과 회유를 적절하게 구사할 때 전략적인 글쓰기가 된다. 지금이야 일본으로 여행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교토에 가면 일본의 전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794년 나라에서 천도한 헤이안쿄가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던 시대로 지금의 교토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때 쓰인 오에노 고레토키(大江維時)가 편찬한 한시 구절 모음집 천재가구에 최치원의 시도 기록되어 있다.
가을이니 감성이 담긴 글을 써야 할 때가 된 듯하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될 때가 있다. 고운 최치원을 조용하게 읽어보니 그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글에서 풍요와 갈길을 찾게 하려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