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경찰대간첩 전적지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 국가와 국가에서 결정적으로 비극이 일어날 때는 바로 소통의 문제가 있다. 최근 서해에서 발생한 우리 국민의 사망사건 역시 소통되지 않는 관계에서 비롯이 되었고 조각조각난 정보를 통해 사실을 추론하다 보니 시간이 지연되었고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비극적인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모든 사건이나 사고 혹은 멀리 과거까지 올라가 이념전쟁은 결국 소통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에 한국전쟁은 휴전상태에 있었지만 적지 않은 희생들도 있었다. 지리산 같은 곳에서의 희생이라던가 간첩이 침투한 가운데 민간인의 희생이나 경찰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간첩이라는 것은 결국 내부의 정보를 소통의 관점이 아니라 정보수집과 공격을 목표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부여에 차량통행이 많지 않은 고개에 부여 대간첩 전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1995년 10월에 발생한 부여 대간첩 작전 시 순직한 경찰관들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경찰충혼탑이 낡고 노후된 것을 2014년에 재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간첩이 이곳에 어떻게 왔고 경찰이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 그림과 장소를 표기해서 알기 쉽게 해 놓았다.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1995년 10월 24일 오후 2시쯤 조용하기만 하던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의 한 시골마을에 총성이 울렸는데 4월부터 부여에 고정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첩보에 따라 국가안전기획부 등이 행적과 은거지를 추적한 지 6개월여 만이다.
간첩을 처음 발견한 지 2시간여 후 정각리 소재 4번 국도에서 2명을 발견했는데 이때 총격전이 일어나고 간첩들은 다시 도주하다가 트럭을 탈취하려다 실패하고 석성산(해발 180m)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파견된 간첩은 서대전에 내린 후 대전 중구 유천동과 도마동 일대 월세방에서 활동해왔다고 하는데 서구 도솔산에 총과 탄약, 무전기를 묻어두고 북과 교신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때 만날 수도 있었다.
당시 김동식이 쏜 총에 복부를 맞은 장 순경이 쓰러졌는데 주변에 있던 동료 경찰들까지 가세해 몸싸움 끝에 김동식을 생포할 수 있었다.
나머지 한 명 박광남을 찾기 위해 예비군 2만여 명까지 동원됐고, 결국 3일 후인 10월 27일 오전 11시경 부여군 가평마을 인근에서 박광남을 발견하자마자 사격해 검거했지만 박광남은 병원 후송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비극적인 사건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결국 소통의 채널이 있어야 한다. 이 사건으로 경찰관인 나성주, 장진희 순경이 사망했으며 부여군과 부여경찰서, 97 연대, 203 여단 등은 매년 경찰충혼탑에서 두 경찰을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