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마음에 담을 풍경은 어디에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한양의 세 궁궐이 모두 불에 탔다. 이때 큰 활약을 했던 인물로 풍산류씨가문의 류성룡이 있었다. 서애 류성룡은 안동과 한양을 수없이 오가며 많은 활동을 했다. 왕성한 활동만큼 지역마다 머무르며 쉴 수 있는 정자를 짓는 것은 보통 사림들의 모습이었다. 문경의 산하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자리한 봉생정은 멀리 문경의 산하의 줄기가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지형을 살려 하나의 건물을 세워 그 풍광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서애 류성룡은 재상으로서 사사로이 자신의 재산인 정자를 지을 수 없어 오가며 쉬었던 이곳에 터만 점지했다고 한다. 고위 관료로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볼 수 있다.
또다시 걸어서 올라가 본다. 진성이씨(眞城李氏) 문중에서 ‘봉생정실록(鳳笙亭實錄)’ 사본과 ‘봉생정영건사적(鳳笙亭營建事蹟)’ 사본에 서애 선생의 제자인 우복(遇伏) 정경세 선생이 지은 것으로 상량문에 있다고 한다.
작은 언덕과 같은 산이지만 역시 이곳에도 가을이 있었다. 정자는 임진왜란 때(1592) 소실됐으며, 200년이 지난 1804년(純祖甲子年)에 문경지역 유림에서 복원을 위해 돈을 모았는데 건립비용을 서애 선생 문중인 안동하회(安東河回) 풍산류씨(豊山柳氏) 문중에서 50양(兩)을 내었다고 한다.
이곳의 자연은 어떻게 보면 기하학적이고 인공적인 냄새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자연의 색을 한껏 담아놓고 있다. 걸어서 올라가다 보면 문경을 흐르는 영강이 보이고 조금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정자 봉생정이 나온다.
가을은 황금색의 벼가 익어가는 풍광이 매력이다.
목조건물은 형태가 비교적 단조로운 편으로 기단이 있으며 몸체가 있고 커다란 지붕이 덮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느 건물이나 다르지 않다. 고택에는 중용에서 나오는 대덕돈화를 생각하게 한다. 큰 덕을 가지고 교화를 돈독히 한다는 의미로 창덕궁에 있는 돈화문을 들어가듯이 입구로 걸어 들어가 본다.
마을을 돌아 언덕 위로 올라가면, 깎아지를 듯한 층암절벽과 울창한 노송 숲이 시선을 사로잡는 이곳 봉생정은 진남교반을 지나 가은읍으로 가는 길옆 마을 입구의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봉생(鳳笙)’은 봉황 모습을 닮은 피리라는 뜻으로 신선이 부는 피리라는 의미다.
절경은 경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 묻어나야 경치가 더욱 빛난다고 한다. 건물만 멋들어지게 들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는 그 사람만의 색깔이 묻어 있어야 한다. 내면이 채워지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리 돈이 많아도 고귀해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