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쓰기

이중인격(adp) - 03

인사동거리

일어나 보니 SMS로 결제내역이 남아 있었다. '[Web 발신] 신한카드 승인 2291최*지 04/20 15:52 도지숙 철학원 200,000원 일시불 누적 1,912,700원' 이 놈은 어제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야. 철학원이라면 점을 봤다는 이야기인데 지가 무엇 때문에 이 상황에 처한 건지 알지 못하는 건가? 또 머리가 아파온다.


잠시 멍하게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현지 씨? 무슨 생각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 지금 클라이언트와 미팅 중인 것을 잠시 망각했었다. "아 죄송합니다." 앞에 화면을 띄워놓고 설명하던 회사 팀장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현지 씨 계속할까요?"

"예 계속해주세요. 이번 뮤지컬 콘셉트가 거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거죠?"

남자는 현지에게서 눈을 돌려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예 그렇습니다.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요. 어떤 의상이 좋을까요?" 현지는 가져온 노트와 러프하게 스케치한 이미지를 여러 장 꺼내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스트리트 패션이란 것이 자유를 의미하기도 하죠. 그런데 무작정 자유스러움이나 그래비티를 티에 프린팅 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제 좀 식상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앞에 있는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은 현지의 설명을 들으며 현지가 준 스케치 이미지를 보고 있었다. 여자는 현지를 바라보며 자신이 보고 있는 스케치 그림을 들 여보였다. "현지 씨 그럼 이 글자들은 뭐예요?" 현지는 말없이 일어나서 앞으로 나가서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젊음을 상징하는 컬러 데님과 후드티 콘셉트에서 벗어나 비선형적으로 보이는 아랍어를 프린트하고 패턴에 응용하였습니다. 다소 난해해 보일 수 있지만 뮤지컬에 등장하시는 분들의 특색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현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럼 여자 주인공의 의상 디자인은 어떻게 하려고요?" 현지는 다른 스케치 디자인을 한 장 빼서 그들 앞에 보여주었다. "여자 주인공은 흰색의 뉴에이지 스커트에 흰색 셔츠를 입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검정 테일러드 코트를 입히면 어떨까요." 팀장은 수긍한다는 듯이 현지를 바라보며 "아 그럼 다소 몽환적인 느낌이 나겠네요. 화려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도드라져 보이는 효과를 연출할 수 있겠어요."


2시간에 가까운 미팅이 끝나고 현지는 밖으로 나왔다. 점심을 사주겠다는 클라이언트의 호의를 뒤로한 채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도지숙 철학원이라는 곳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들었지만 그놈과 똑같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싫었다. 점이나 미신 같은 것은 아예 믿지 않는다. 그런 걸 믿는다 하더라도 준구가 있는 이상 온전히 내 마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당들이나 철학 같은 건 결국 불안한 미래를 담보로 돈을 버는 곳 아닌가. 주변에 사건이 생기고 일이 제대로 안 풀리면 마치 운이 안 좋아서 그렇다는 듯이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라는 것이 더 절실할수록 그런 사람에게 돈을 뜯어내는 것이 더 쉽다. 무당에게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뜯겼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그런 걸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놀랍다. 그런데 내 몸을 공유하는 그놈은 그렇게 비합리적인 행동을 한다. 대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가 있는 걸까. 허세끼가 넘치는 남자들을 지금까지 수없이 봐왔다. 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 1인분에 10만 원이 넘는 코스요리를 사고 수입은 변변치 않은데 수입차를 끌고 나오는 그런 남자들을 보면 한심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한심한 놈 준구


다음 미팅 장소로 이동하려고 시동을 걸었을 때 미팅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현지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예 최현지예요."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낮으면서도 지적인 느낌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의 여성이다. "이가 나무의 김진숙이에요."

"예 안녕하세요. 지금 그쪽으로 가려고 하는데요."

"어쩌죠. 오늘 갑자기 출장이 잡혀서요. 혹시 내일 오후 2시는 안될까요?"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내일은 제가 안되거든요. 짝수일에는 제가 하는 일이 있어서요. 내일모레 오전 11시에는 가능할 것 같은데요."

"맞다! 홀수날만 된다고 했었죠. 그래요. 그럼 23일 오전 11시로 잡아놓을게요. 그때 봬요."

"예 그때 뵐게요." 전화기를 끊으며 현지는 한숨을 내쉰다. 한 달에 최대한 일할 수 있는 날이 15일에 불과하다. 그리고 클라이언트들에게 이걸 납득시키는 것도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지 모르겠지만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클라이언트 일정이 있을 때는 2일이 아니라 4일에서 1주일까지 지연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계약이 깨진 경우도 여러 번 되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간이 비어버리면 붕떠버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까 클라이언트에게 전화해서 생각해보니 밥 먹어도 되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럴 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있다.


현지는 차를 몰아 인사동 거리 쪽으로 향했다. 카드사와 제휴가 된 주차장에 주차를 시킨 현지는 가방을 들고 인사동 거리로 걸어나왔다. 인사동 거리를 걸으면서 유심히 쳐다보면 디자인하는데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얻을 때가 있다. 그리고 현지 입맛에 맞는 케밥을 파는 곳도 그곳에 있었다. 쇠고기가 들어간 6,000원짜리 케밥 하나면 한 끼 해결하기에 딱 좋다. 자신이 주문한 케밥을 손에 든 현지는 한 손에는 케밥과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를 들고 어깨에는 가방을 멘 채 인사동 거리로 나왔다. 시끄러운 것을 보아 중국 사람들 같아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이드로 보이는 여자가 일행들을 쳐다보며 "Zhèshì rén sì dòng jiē." 대충 번역해보면 여기가 인사동 거리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가이드는 체구가 큰 편이었는데 얼굴에 욕심이 많다는 것이 쓰여있는 느낌이다. 중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쇼핑만 강요한다고 하더니 저 가이드도 그럴 것 같다. 현지는 중국인 일행의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케밥을 한입 베어 물었다. 양념이 된 소고기에 양파와 야채 그리고 매콤한 소스가 어우러져서 씹히는 맛이 좋다. 천천히 씹어서 넘긴 다음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제법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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