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저수지 둘레길
간혹 생각나는 문구가 있다. 필자 역시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그린 슬램덩크라는 만화에 푹 빠졌던 세대로 그 대사 하나하가 기억이 난다. 슬램덩크의 마지막은 31권으로 허리에 심각한 부상을 당한 강백호가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체해달라고 하면서 감독의 영광의 시대를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국가대표였냐고 물으며 자신은 지금이라는 말을 한다. 과거에 못한 것이나 잘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맥락으로 받아들였다.
해가 저물어갈 때 보령 청천저수지에 조성되어 있는 둘레길을 찾아갔다.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 때론 버거울 때가 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아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항상 소중하고 중요하며 의미가 있다.
서해안 최대 규모의 무궁화를 주제로 한 수목원인 보령 무궁화수목원도 있고 백사장 길이가 3.5㎞, 너비는 100m, 면적은 3만㎡인 대천해수욕장도 있고 우리나라 최대 은행나무 군락지 중의 하나로 알려진 청라 은행마을도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사람이 없는 곳을 찾으라면 이곳만 한 곳도 없다.
해가 벌써 저 건너편으로 넘어가고 있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인 동지가 지나야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올해의 동지는 12월 21일이다.
걸으면서 해가 짧아진 것을 생각하니 동지가 생각나고 동지를 생각하니 팥죽이 연상된다. 팥죽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1년에 1~2번은 생각이 나는 맛이다. 너무 달달하지만 먹고 나면 무언가 귀신을 쫓아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낙엽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만 귀에 들려온다. 청천저수지 둘레길에는 다양한 수목이 심어져 있는데 입구에서부터 중간까지 가장 많은 나무는 대나무다.
사유지를 통과하는 구간을 의미하는 계도 표지판도 보인다. 계도라고 함은 중간의 완충적인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어 마스크 착용 의무화는 10월에 계도기간을 거쳐 11월 13일부터 본격적으로 과태료를 부과하듯이 법적인 의무는 없지만 적응하는 기간이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청천저수지의 물 위로 붉은 기운을 남기고 빠르게 다시 넘어가고 있다. 꽃길만 걸어가고 싶지만 때론 보이지 않는 돌에 발목이 삐끗하기도 하고 거친 노면에 휘청거리기도 한다.
지난 2017년 사업비 1억여 원을 들여 총연장 5.82km 규모의 둘레길을 조성했으며, 이곳은 국도 36호와 리도 208호를 따라 청천호 호수공원 서쪽 약 500m쯤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다. 수변을 따라 고즈넉이 걷다가 야트막한 산허리로 난 숲길로 접어들면, 살포시 귓가를 스치는 산바람과 좌측으로 보이는 잔잔한 수변 풍경은 마음속에 추억을 남겨준다.
돌아서 나오는데 노란 꽃이 보인다.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듯이 꽃은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