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쓰기

오래된 라디오(Radio of old memories)

나만의 주파수

이 이야기는 아무 일 없고 한가하고 별일이 없이 해가 중천에 떠오른 아주 평범한 날에 시작이 되었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내가 좋아할 만한 영상만 계속 이어서 보여주는 유튜브에 식상함을 느꼈던 어느 날이다. 요즘에는 나만 빼고 세상은 나에 대해 모두 아는 것만 같다. 그나마 1인 최소 주거면적은 넘을 것 같은 원룸의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요즘에는 침대의 중력이 커지는 듯 빠져나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도 이 집에는 창고라고 말할 수 있는 작은 서비스 공간이 있다. 육 개월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쓰시던 물건들을 여행용 캐리어에 담은 다음 창고에다가 두고 열어보지도 않았다.


너무나 무료했을까. 갑자기 아버지가 쓰던 오래된 물건들이 궁금해졌다. 요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혹시 돈이 될만한 것이 있을까란 아주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혹시 작은 금괴(영화에서 보던 그런 들기도 힘든 그런 것은 아니다)라도 있다면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가서 절이라로 올릴 생각도 있었다. 남아 있던 베이컨과 빵으로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챙겨 먹고 힘을 내서 벗어나 캐리어를 끄집어냈다. 꽤나 묵직했다. 여행은 언제 가봤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시간이 지났지만 그나마 캐리어는 아주 튼튼한 것을 사두었다.


캐리어 안에는 오래된 만년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르는 카메라, 한자가 잔뜩 쓰여 있는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책자 몇 권, 도자기로 만들어진 인형, 오래된 램프, 지역에서 열심히 봉사해서 받은 공로패와 그밖에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과 대충 알 것 같은 물건들과 함께 크기가 좀 있는 오래된 라디오가 눈에 뜨였다. 방에 그걸 다 늘어놓고 보니 마치 오래된 골동품 작은 상점처럼 보였다. 안타깝게도 기대했던 것은 나오지 않았다. 유품이라면 유품인데 원룸 방의 작은 기적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몰라서 오래된 램프를 살짝 문질러보았는데 지니는 나와주지 않았다.


늘어놓고 보니 치우는 게 귀찮아졌다. 일어나서 다시 침대로 와서 누워 스마트폰을 들고 이것저것을 실행하고 그것마저도 귀찮아져서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가전기기들이 빌트인 되어 있는 집이라서 딱히 내 것이라고 말할만한 비싼(?) 물건도 없는 곳이었다. 내가 가진 것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의 은행 앱에 숫자로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숫자의 크기가 크지 않아서 아주 천천히(너무나 천천히 변해서 마치 멈추어버린 것만 같은) 숫자가 변해갔다. 일을 못한 지 한 달 가까이 된 지금 그 숫자마저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아까 보았던 오래된 라디오를 끄집어냈다. 오래되어 보였지만 다행히 11자의 전원 끝에는 220 볼트로 연결된 어댑터가 끼워져 있었다. 괜히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할 일도 많지가 않았다. 콘센트에 전원을 연결하고 라디오를 자세히 살펴보니 우측 아래에 Power와 Volume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 더 우측으로 돌리니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주파수만 맞추면 되었다. 라디오는 어릴 때 아버지의 차를 타고 다닐 때 들어본 것이 전부였다.


숫자로 되어 있는 주파수 채널에 위쪽에는 Mhz, 아래쪽에는 Khz라고 되어 있었다. 헤르츠가 진동수의 단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동과 감수율의 차이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다이얼이 어떤 숫자를 표시하는지는 알 수 있다. 라디오가 망가졌는지 여러 번 시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지지직 거리는 소리 대신에 사람의 목소리나 음악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요즘처럼 디지털 숫자로 표시할 수 있다면 쉬웠을 텐데 아날로그식은 조금만 움직여도 그 변화를 알기가 힘들었다.


한 30여분을 시도했지만 그 노력이 의미가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소리가 들렸다. 그릇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TV 같은 것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무언가를 먹는 소리 등등의 소리들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10여분을 듣고 있다가 이 방송이 무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때쯤 혼잣말로 말했다. "이게 무슨 라디오야. 망가진 것 같아." 그러자 갑자기 건너편에서 생활 속 소음이 멈추었다. 잠시의 적막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건너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사람 있어요?"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 목소리였다. 나에게 하는 말인가? 혼자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스마트폰을 들어서 통화 중인지 살펴보고 혹시나 모를 카메라가 있는지도 찾아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혹시 저한테 말을 한건 가요?" 몇 초쯤 지났을까.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요."


환상이었을까. 그녀의 말을 듣고 이 대화를 지속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전원을 빼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갈등이 생겼다. 호기심이 생긴 것은 분명해 보였다. 직장의 문제도 있었지만 좋은 감정으로 만나던 그녀와 시간을 두기로 한 후 하루하루 무료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때론 인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아직도 거기에 계시는 건가요? 혹시 거기도 라디오로 하는 건가요." 아주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답변이 돌아왔다. "예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라디오는 원래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없지 않나요?"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원래 라디오는 한 방향으로 발신하는 기계잖아요."


그렇게 그녀와 이야기가 이어져갔다. 딱 두 시간 동안이었다. 다시는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아무리 주파수를 맞추려고 해도 맞추어지지가 않았다.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지만 우리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때론 하소연과 고민 혹은 주변 이야기를 했다. 나만의 주파수를 찾는 것은 때론 잠시 다른 사람과의 주파수와 같이 맞추어지는 것과 같다. 나는 방안에 널려져 있던 골동품들을 캐리어에 정리해서 넣고 방 한가운데에 오래된 라디오만 남겨두었다. 내일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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