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사랑했던 내 모습
이제는 사랑이 퇴색되어갈 나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름이나 사는 곳을 물어보는 것보다 삶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그녀의 대답에 물어보지는 않았다. 자존감이 높아 보였던 그녀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었다. 사랑이란 건 상대방을 사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되물었다. "그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건가요?"라디오의 반대편에서는 커피를 끓이는지 무언가 끓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그런 게 아니에요. 사랑하면 사람이 이뻐진다고 하잖아요. 사랑하는 그 자신의 모습이 변화는 거예요. 상대방으로 인해 변해가는 자신이 좋은 거예요."
LP판의 지지직 거리는 그런 낯설음 속에 그녀의 목소리는 에너지는 조금은 남다르게 느껴졌다. 체념도 아닌 희망도 아닌 그렇지만 미래에 대한 담담함이랄까.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혹시나 모를 그녀에 대한 미래 혹은 건강이 염려가 되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오래되었던 기억이 함께 공존하는 것 같은 그녀라고 할까. 여자와의 대화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성숙한 사람과의 대화는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해 주었다.
"실례가 안된다면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라디오 너머로 그녀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흔다섯 살이에요.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나이라고 생각해요." 여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소녀와 같다는 이야기는 남자로서는 참 이해하기가 힘든 표현이다. 그냥 나이는 먹은 것뿐이었다. 생각해보니 나이가 먹었다는 표현도 적당하지 않아 보였다.
"건강은 하시죠?" 왜 그런 걸 물었는지는 잘은 모르겠다. 저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간에 자신에게는 별다른 변화는 없을 것이었다. "건강! 뭐 사람은 누구나 죽어가는 과정 속에 있잖아요. 악성종양이 있기는 한데 바로 죽을 것 같지는 않아요." 어떻게 저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란 생각을 하면서도 나이가 들면 그럴 수가 있는가란 생각도 했다.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서 삶에 대한 미련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가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으로 아니... 얼마나 변했을까.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가 듣고 싶어 졌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얼마나 변했을지에 대한 궁금함과 함께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지 말이다. "사랑했어요?"
"그건 누구도 말할 수 없어요.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그렇지만 관계를 잘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분노나 의심을 다스리는 거예요. 분노는 너무 빨리 달려요. 잡고만 있어도 끌려가거든요. 개를 키우는지는 모르겠지만 덩치가 큰 개만큼이나 사람을 끌고 가는 게 분노예요. 저야 지금은 차분해졌지만 젊은 나이가 가진 에너지는 사람은 어떤 방향으로든 끌고 가거든요."
솔직히 알 수도 없었고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기본적인 이야기야 누구나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을 잘 제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러면 좋은 관계가 되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게 쉽냐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