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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1. 2021

가문 (家門)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노강서원

하나의 가문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데에는 학문과 경제의 양축이 모두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는 주로 학문기반하에 경제는 도외시한 것 같았지만 출세를 기반으로 땅을 확보하였다. 가문을 이루는데 정신적인 기반이 되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 바탕에는 대를 이은 교육이 있었다. 현대에도 공고한 가문의 힘은 여전히 지속성이 있다. 19세기 이래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에는 로스차일드 가를 대표로 하는 국제 은행 가문이 탄생했다. 코로나 19에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가 돈을 엄청나게 풀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은행가문의 영향력도 적지 않다. 

논산 하면 생각나는 두 가문은 파평 윤 씨의 가문과 광산 김 씨의 가문이다. 두 가문다 학문으로 논산의 양대 축을 이루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왔다. 논산에 자리한 파평 윤 씨중 중심이 되는 인물은  조선 중기 팔송(八松) 윤황(尹煌: 1571~1639)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들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 손자인 윤증(尹拯) 등 충청도 지역 소론계 유학자의 대를 이어가며 이곳에서 가문을 이루었다. 이곳은 팔송 윤황을 모신 노강서원이라는 곳이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4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0호, 2017년 국가지정 사적 제540호로 지정된 노강서원은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철폐하지 않은 27개 서원 중 하나다. 돈암서원의 강당도 건축양식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곳 노강서원의  강당은 17세기 말 유교건축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2011년 보물 제1746호로 지정되어 남다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요즘에는 경제적인 관점에서의 배움을 하고 있다. 배움의 때를 놓치고 나면 백이면 백 모두 후회를 한다. 반복되는 좋지 않은 습관을 바꾸고 싶어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잘 바꾸지 못하는 것은 배웠던 것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논산의 노강서원이라는 곳을 가봤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와본 기억이 전혀 없다. 김장생을 모신 돈암서원의 강당이 시원스럽게 보인다면 윤황을 모신 노강서원의 강당은 역사와 디테일이 살아 있는 건축물의 느낌이었다. 

노강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도로 외삼문, 강당, 사당을 서원의 중심축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대칭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어 서원건축의 규범을 잘 보여주는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윤황은 1597년(선조 30)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임명되었으며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북청판관으로 혼인한 자제를 거느리고 관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시골에 은거하였다

윤황은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다는 평을 들었으며 명분을 중요시했던 사람으로 그의 생각은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하나의 가문을 이루었던 윤황 선생의 호가 팔송인 이유는 그가 살던 곳이 남별영이 있던 곳으로 소나무 8그루가 둘러싸여 있고 샘이 있어 팔송정이라고 불렀는데 그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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