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음악가 우륵을 찾아서
오늘날 음악은 다양한 형태로 소비가 되고 있다. 오래전 보다 훨씬 많은 음악이 등장했지만 미디어에 의해 특정한 분야의 음악만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인류는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존재로 서로 소통하고 인연을 맺기 위해 음악을 사용해왔다. 문자나 기록물이 풍부하지 않았을 때 노래를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며 후대로 이어져왔다. 음악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탐구하고 표현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아주 오래전에 음악은 어떻게 전파되었을까.
기록이 명확하지 않을 때 여러 가지 전설이 더해지고 거기에 더 많은 이야기가 붙게 된다. 우륵이라는 사람은 대가야가 있던 고령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한데 우륵은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가실왕이 우륵에게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며 12곡의 악곡을 지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만 전하고 있다. 국가의 마지막이 혼란하게 되듯이 가야국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우륵은 제자 이문(尼文 혹은 泥文)과 함께 낭성에 숨어 살며 노래와 춤을 닦았다고 한다.
고령에 가면 우륵박물관과 함께 가야금을 만드는 장인이 옆에 거주하면서 가야금을 제작하고 있다. 우륵이 집대성한 가야 음악은 신라의 대악(아악, 궁정음악)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우륵이 가야에서 지었던 12곡은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下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己), 사물(思勿), 물혜(勿慧), 상기물(上奇物),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인데 계곡, 법지 만덕이라는 세 제자는 우륵이 만든 12곡을 가리켜 “번거롭기만 하고 바르지 못하다.”라며 5곡으로 줄여 버렸다고 한다.
우륵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는데 이 모습처럼 살았는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삼국 통일을 완수할 때까지 민심을 하나로 모아야 할 필요에 의해 우륵의 음악은 신라로 가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런 초가집은 매년 관리가 되어야 보존이 가능하다. 우륵은 우리나라 3대 악성중 한 사람으로 무려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봄꽃이 필 때 우륵을 찾아와서 음악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하루하루 설레는 음악의 말이 전해질 때 삶의 에너지가 풍요로워진다. 오래된 이 땅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음악적 각성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음악은 결국 생맹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듣고 느껴야 한다.
우륵의 생가가 있는 이곳은 정정골 마을이라고 한다. 앞서 말한 성열현 출신이라 말했던 우륵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다. 악성 우륵이 이곳에서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을 창제하여 연주하니 그 소리가 골을 받아 이곳에 울려 퍼져 정정골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