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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04. 2021

벚꽃 읍성

해미읍성에 핀 고고함

벚꽃이 홀로 피어있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름다울 수는 있다. 그 주변 환경이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의 가치다. 좋지 않은 환경 속에 피어난 벚꽃보다 어떤 나무를 가져다 놓아도 좋은 공간에 놓인 벚꽃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오래간만에 찾은 해미읍성에서 벚꽃을 보았는데 길가에 줄지에 늘어선 벚꽃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모두가 아름다워 보이는 환경 속에 어떤 것이 있어도 좋아 보인다. 

현재 해미읍성은 복원 중에 있었는데 그 부분만을 제외하고 방문객들에게 개방이 되어 있었다. 해미읍성은 성벽도 높은 편이어서 성을 둘러싼 해자(垓子)와 함께 전투에 최적화된 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1579년(선조 12) 충청병영 군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한 곳이어서 작년에 축제를 준비할 때만 하더라도 이순신이 주요 콘셉트이었는데 코로나 19에 축제가 열리지 못했다. 

조선 초기인 1417년(태종 17)부터 1421년(세종 3)까지 4년여에 걸쳐 축성, 서해안 방어를 맡으며 충청 병마절도사 영은 충청도군을 지휘하던 육군 최고지휘관이 있던 곳으로 충청 병마 절도 사영이 성안에 있던 해미가 서해안의 군사적 거점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조용하게 주변을 돌아보며 이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했던 환경이나 분야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환경에 익숙해지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미읍성과 같은 공간을 자주 찾는 이유는 어떤 것이 바뀌었는지 궁금하고 새로운 변화를 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안에 주거공간은 사라졌지만 홀로 서 있는 벚꽃나무가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 해미읍성안에서 벚꽃이 피는 모습은 처음 보았는데 이런 풍광 속에서 피어난 벚꽃은 그냥 보아도 아름다웠다. 해미읍성에는 동·서·남문과 북문인 암문 등 4개의 문이 있으며 남문과 서문 사이에 2개의 치성이 있다.

해미읍성 내에 있는 옥사. 지금은 관광객들의 볼거리이지만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했던 곳이 바로 이 공간이다. 

저 앞으로 걸어가면 성내에서 북쪽으로 가면 가장 높은 능선에 세워져 있는 ‘청허정’이라는 누정(樓亭)이 있는데 저곳에서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무예를 익히기도 했으며 문객들은 시를 짓기도 하는 등 다용도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인연이라는 것이 묘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영위했고 수감된 천주교도들을 끌고 나와 이 나뭇가지에 철삿줄로 신자들의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기도 했었다. 해미읍성에는 적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탱자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해미읍성내에는 탱자나무를 볼 수 있다. 

나가는 길의 문루 아래 받침돌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데 1491년(성종 22)에 진남문이 중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해미읍성은 중요한 군사거점으로 역할을 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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