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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04. 2021

인연

회덕현감을 지냈던남산 서원의유지화

대전에 살고 있어도 회덕이라는 지역을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하물며 다른 지역에  살면서 회덕이라는 지역명을 아는 사람은 적을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옛 지명을 많이 알고 옛사람을 만나지만 보통은 바로 지금의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대전광역시라고 불리는 곳은 옛날 회덕이라는 지명으로 훨씬 오랜 시간 불렸던 곳이다. 그 이름의 의미조차 좋다. 회덕현 관아는 지금은 없어지고 초등학교가 그 위를 덮고 있지만 회덕현감을 지냈던 사람은 많았다. 

회덕현감을 지냈던 사료를 찾다 보니 유지화라는 사람이 있었다.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는데 그는 1633년(인조 11) 효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등을 역임했던 사람이다. 그 유지화라는 사람이 바로 김제의 능제가 자리한 남산서원에 모셔지고 있었다. 

이곳이 능제에서 안으로 들어오면 자리하고 있는 남산서원이다. 그는 병자호란을 당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척화론을 주장하였다. 이어 통진·회덕 현감 등에 제수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세상에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역사가 오래되었다기보다는 새롭게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남산서원의 사당이름은 남산사다. 진주유씨는 여러 번 들어본 기억이 난다. 그의 자는 후성(後聖), 호는 반구당(伴鷗堂).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유희춘(柳喜春)이고, 아버지는 사복시주부 유광복(柳光復)이며, 어머니는 어머니는 승지 홍치상(洪致祥)의 딸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으나 1970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기에 그 역사가 짧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4칸의 영모재(永慕齋), 경의문(景義門) 등이 있다. 

사람은 꼭 앞에 있을때뿐만이 아니라 옛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하다. 물론 답은 스스로 내리는 것이겠지만 회덕이라는 지역명이 지금보다 널리 쓰인 것을 보면 중부권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모재는 강당으로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회합,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학문의 토론이라는 것은 생각의 힘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유지화는 계모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문에 ‘반구당’이라는 편액을 걸고 당대의 명류들과 경전을 토론하며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남산서원에서 조금만 나오면 무궁화나무를 빼곡히 심어놓은 곳을 볼 수 있다. 어떤 용도에서 심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궁화 뒤로 능제가 보인다. 그는 1680년(숙종 6)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추록되고 통정대부에 승서(陞敍)되었으나, 조정의 명이 하달되기 전에 죽었으며 김제 남산서원(南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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