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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5. 2021

을사사화 (乙巳士禍)

세상 뭐 있나 순창의 경치에 머물다.

예로부터 보면 경치 좋은 곳은 약간은 위험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자 건축의 역사는 그런 곳에서 주로 시작되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끝이 없어서 역사 속에서 수많은 피바람을 만들어냈다. 지금도 정치 쪽에서 수많은 계파가 이해득실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선 인종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 불과 8개월 만에 승하하였는데 강한 성격의 문정왕후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 인종이 세자 시절의 스승이 바로 김인후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 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났는데 사림과 그의 반대파를 숙청함으로써, 비명에 죽은 명사만도 을사사화 이래 5, 6년간 100여 명에 달하였는데 이때 김인후도 이곳 순창으로 낙향한다. 

이곳은 김인후가 지은 정자는 아니고 김인후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훈몽재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다가 이곳에 와서 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인 김노수가 조상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1900년에 낙덕암 위에 지어놓았다고 한다. 

계단을 걸어서 올라오면 낙덕정이 보인다. 조금은 독특하게 만든 건축물이다. 이런 형태의 정자는 조선왕굴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팔각단층으로 지방에 지어진 경우는 많지가 않다.  사화의 영향으로 사림들이 고향에 은둔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지만 서원의 발달과 성격은 조선왕조의 정치문화적 특성과 정치투쟁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낸다. 

정사각형의 방이 가운데 있고 주변으로 대청을 배치한 형태다. 사방으로 한꺼번에 트인 구조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지 정치 휘말림에 휩쓸리지 않고 지방으로 낙향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홍문관 교리와 나주 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1501~1572)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자연을 벗 삼아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별서(別墅)인 환벽당(環碧堂)도 있다. 

사람 한 명쯤은 대청에 앉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문을 다 열어놓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경치 좋은 곳에 올라와서 보니 딱 실족하기 좋은 느낌이었다. 탁 트인 곳이 많지가 않아서 좀 아쉽기는 하지만 수목들이 울창하고 저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흘러내려 저 아래로 흘러가고 있다. 주변에 울창한 숲이고 골짜기 사이의 바위 위로 샘물이 흘러내려가 마음이 저절로 맑아질 듯하다. 

저 아래로 아저씨로 보이는 분이 물에서 무언가를 채취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보는 사물을 한낱 있는 그대로 직관하고 사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개념화하고 개념으로써 실제 세계를 형상화하는데 이는 조금은 특별한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의 기록으로 남아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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