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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9. 2021

성찰하다

나아가지 않고 연구한 윤문거

말을 잘하는 것보다 글을 잘 쓰는 것이 쉽지가 않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보고 수많은 시간 동안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글을 잘 썼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충청도는 사계 김장생이나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에게서 이어진 경우가 많다. 외국의 수많은 철학자 중에 안티파트로스는 말보다 글을 선호했던 사람이자. 자신의 주장을 차분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개인과 진심으로 교감하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익(趙翼)·김상헌(金尙憲) 등에게도 배웠던 윤문거의 묘소를 찾아가 보았다.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혼(成渾)의 딸이니 부모의 집안은 학문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명문가였다. 

윤문거 묘소로 가는 길은 대백제로의 길로 가면 되는데 드넓은 논이 시원하게 펼쳐진 곳이다. 백제라고 하면 공주와 부여를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데 사실상 그 마침표는 논산에서 찍었다. 그래서 백제의 이름을 붙인 도로가 있다. 

백제의 마지막을 지킨 계백장군의 묘도 논산에 있고 후백제를 일으켜 세웠던 견훤의 묘도 논산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논산에서 마지막으로 백제군을 물리쳤기 때문에 연산면에 자리한 황산의 이름을 천호산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천호산은 하늘이 도와 백제군을 물리쳤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실 분들은 갈산 2리에서 내리면 된다. 윤문거 묘소는 충남 논산시 광석면 갈산리 515-3에 자리하고 있다. 윤문거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사간원 정언으로 척화의(斥和議)를 진계(陳啓)하였고, 그 해 12월 청나라가 침입하자 아버지를 따라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가(扈駕)하였다.

안쪽으로 들어오자 윤문거의 묘소가 보인다. 그는 이후에 동부승지·호조참의·경주 목사·홍문관 부제학·대사헌·이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는 석호 유고(石湖遺稿) 3권을 썼다.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윤문거의 묘소로 걸어서 올라가 본다. 

그의 공적과 족적을 남긴 비가 앞에 세워져 있다. 배움에 정진하고 덕이 천성이 될 때까지 노력하는 일은 인생 속에서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삶에서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가듯이 마음대로 되는 일은 많지가 않은데 계속해서 시도하고 더 노력할수록 더 좋은 결과를 이룰 확률이 높아진다. 

석상이 윤문거 묘소 앞에서 묘소를 지키고 있다. 윤문거의 묘비는 팔작지붕 모양의 가첨석을 갖추어 1781년 윤증이 비문을 짓고 윤동섬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그는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석성(石城)의 봉호서원(蓬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그가 한 벼슬 중에 동래부사가 눈에 뜨인다. 동래부는 임진왜란 때 최초로 빠르게 무너진 곳으로 익숙한 곳이다. 동래부사로 근무했을 때는 병사와 백성을 어루만지고 충렬사를 재단장하고 은연중에 조세를 감면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가 남긴 '석호유고'에는 애사(哀辭)는 1658년 이후 지은 것들 총 7편만 남아 있는데,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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