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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8. 2021

정보화 전쟁

천안지구 전투에 자리한 마틴공원

2 세계대전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원자폭탄 자체가 전쟁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믿었다. 원자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방사선에 대한 연구도 부족한 때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7  육군 항공대에서 독립한 미공군은 원자력 항공기 개발을 시도했지만 전투기에 핵무기를 탑재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가 주장했던 것처럼 북한에 핵폭은 소련이 1949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기 못했다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시나리오다. 정보화 전쟁 시대의 서막을 열면서 동시에 재래식 전쟁을 했던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그래서 많은 인명피해도 있었다.

지금은 평화롭기 그지 않는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천안지구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내려가는 하천 옆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천안 삼거리 이정표가 있으면서 구성동 사거리 부근이 이곳이다. 34 연대로 이루어진 미군의 병력이 1950년 7월 8일 북한군의 3개 사단과 접전을 벌였던 곳이라고 한다.

천안 박물관 뒤편에 자리한 이곳에서는 천안을 고수하고자 이곳 부근에서 북한군 탱크에 맞서 바주카포로 공격하다가 북한군의 탱크로부터 사격을 받고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마틴공원의 의 바로 옆에는 초등학교가 있기에 엘로우 존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시각적으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신호등을 기다렸다가 바뀌고 나서 걸어서 건너가 본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이 있기도 했지만 해전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곳 추모탑에는 당시 전투에서 최종 사망자인 129명은 아니지만 109명의 전사자가 명각되어 있다. 당시 미군은 경기도에서 북한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고 마지막 방어선 낙동강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마틴 대령은 연대병력으로 북한군의 기갑사단을 비롯하여 보병사단 2개 사단을 잠시 이곳에서 잡아두었다. 한국전쟁은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사이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으며 우리 민족에게는 크나큰 아픔이 있었던 전쟁이기도 하다. 현대 전쟁사에서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은 천안지구 전투 2개월 후에 벌어진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이다. 마틴 대령과 그 연대병력의 희생 같은 여러 전선의 없었다면 방어선 구축이나 상륙작전 역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을 지나갈 일이 많지가 않았다가 초등학교가 있어서 천천히 지나가다가 우연하게 발견한 공원이다.

이곳이 왜 천안삼거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다. 예로부터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천안은 여러 왕조시대에 길과 사람, 물자가 드나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으로 교통의 요지였던 곳이다.

길목이었던 이곳에 전투의 흔적이 남겨져 있으며 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천안 삼거리는 역사적인 사건과 사고, 삼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며 군대의 파병도 있었던 곳이다. 산악으로 둘러싸여 바닷길이 발달되었던 한반도에서 천안삼거리는 의미가 남다르다.

같은 공간에서 사람의 이야기와 애환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던 마틴 대령과 그 장병들의 이야기가 공존된 느낌이다. 천안은 그만큼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천안을 거쳐 가는 도로는 6대로와 7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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