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의 오래된 이야기 대가야
대가야 혹은 고령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썼지만 대가야을 관통했었던 연주 악기인 가야금은 이제야 본격적으로 접하고 있다. 그 옛날에도 이렇게 많은 연주법이 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큰 틀은 안 바뀌었지만 지금은 가야금의 연주가 다이내믹해졌다. 알고서 보면 참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대가야의 고장에는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우륵의 이야기가 있다.
고령의 개진면에서 돌아가는 낙동강을 따라서 가면 고령군의 중심인 대가야읍이 나온다. 그냥 강변의 길로 따라가도 도착할 수 있고 중간에 개경포 기념공원에서 개진면 사무소에서 가로질러가도 고령군에 들어서게 된다.
고령에는 오래전부터 대가야의 혼을 살리기 위한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오랜 시간 만들어진 이곳 고령 대가야 종묘도 그곳 중 한 곳이다. 대가야 종묘는 제사등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항상 열려 있는 곳은 아니다. 대가야 종묘에서 조금 더 읍내로 나오게 되면 옛날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국도변을 그냥 따라가다 보면 돌로 된 당간지주가 나온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들어놓은 돌기둥이나 철기둥을 말하는데 대부분 돌로 만들어지며 철기둥은 한국에 딱 세 개만이 남아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청주에 있는 철당간이다. 다른 지역에 있는 철당간은 아직 보지는 못했다.
당간지주가 대가야읍의 중심에 남아 있다는 것은 이곳에 작지 않은 사찰이 있던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중기인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단정하고 아담하며 조작 솜씨가 뛰어난 당간지주로 평가되고 있다.
오랜 시간 이곳은 공영주차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대가야 종묘와 멀지 않은 곳에 축을 이루는 대가야정 조성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녹지 및 산책로를 비롯하여 수리시설과 트인 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다.
고령군은 본디 대가야국으로 존속 기간이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부터 도설지왕(道說智王)까지 16세(世) 520년으로 보고 있다. 이런 도면도 참 오래간만에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금관가야와 고령가야를 모두 ‘가라(加羅)’라고 불렀는데, 때로는 금관가야를 ‘남가라(南加羅)’라고 하여 고령가야와 구별하고 있다고 한다.
지하주차공간이 만들어지기에 대가야정은 시민들이나 고령에서 행사하는 다양한 축제나 프로그램이 있을 때 이곳을 주차공간으로 활용을 할 것으로 보인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유물은 다른 지역들에 비해 질과 양의 측면에서 우월성을 유지하고 있어 해당 시기에 고령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여러 가야연맹 체중에서 금관가야가 비교적 초기에 쇠락하고 이곳 고령이 그 중심으로 오랜 시간 존속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