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의 묵정영당과 고령신씨의 묵정사
지금까지 고령신씨의 흔적을 만나봤던 곳은 고령과 순창 그리고 청주다. 고령이야 본관이어서 그렇지만 순창과 청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신숙주의 흔적은 청주에 있으며 동생인 신말주는 순창에 머물렀다. 고령신씨의 이야기는 청주의 묵정영당과 묵정사, 신중엄 신도비로 남아 있다. 어떤 길이 바람직한지는 시간이 지나고 봐야 알 수 있지만 정도의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아래와 같다.
"뛰어난 선비는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보통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며, 못난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으니 못난 선비가 듣고서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보통 같은 성씨가 머무는 곳을 집성촌 혹은 세거지라고 부르고 있다. 세거했던 곳을 세거비라고 세워서 그 의미를 후손에게 알리기도 한다. 청주의 고령신씨산동세거비는 고령신씨가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고령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도 많은데 고령 신 씨도 그중 하나다. 고령 신 씨(高靈 申氏)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였다. 고령 신 씨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신채호, 신숙주 등이 있는데 신숙주는 세조 때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다. 청주에서 고령 신 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대를 이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벼슬길에 올랐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 초기 문신이며 학자였던 신숙주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인 묵정영당이다. 1984년과 1989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문충이며 네 차례의 공신호와 고령부원군에 봉해졌으니 고령신씨의 핏줄중 가장 큰 출세를 한 셈이다.
지역에 고립되지 않고 외부세계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이어가던 산동신씨들은 청주를 대표하는 세거문중이 되었다고 한다.
이 비는 청주 신중엄의 신도비인데 신중엄 신도비는 1.71m의 화강암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머리는 용머리 형식으로 조각미가 있다.
신중엄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심으로 효행이 지극했다고 한다. 벼슬실에 나아가서는 수령을 지내면서 백성을 교화로 인도하였다고 한다.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동남쪽 길가에 남쪽을 향햐여 세운 비석으로 왕명에 의하여 세워지게 된다.
묵정사는 청주시 향토유형 제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예조판서를 지냇던 신덕린, 공조참의 신포시, 공조참판 신장, 대사헌 신식, 황해감사 신용, 종산 신집 등을 기리고자 1942년 고령신씨 문중에서 단을 만들고 1971년 위패를 모시고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최근 '청주 고령신씨 명가묵적(淸州 高靈申氏 名家墨蹟)'을 도 유형문화재 제409호로 지정했다고 한다. 청주에 오랫동안 살아온 고령신씨 영성군파 문중에서 전해온 것으로 신숙주의 4세손인 신중엄(申仲淹·1522∼1604)의 팔순 잔치에 그의 아들 신식(申湜·1551∼1623), 신설(申渫·1561∼1631) 형제가 손님을 초대하거나 따로 시를 받아 묶은 경수도첩(慶壽圖帖), 신식·신설 형제의 관리 경력과 관련한 연경별장(燕京別章)·관동별장(關東別章)·해서별장(海西別章) 등 6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