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스토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Jul 24. 2016

혐오

분노 폭발 사회의 탈출구

혐오라는 것의 사전적인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불결한 것을 혐오한다.

무책임한 것을 혐오한다. 

혐오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정도가 상당히 큰 것을 의미한다. 

보통은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고 그것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근의 사건들을 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고 있다. 원래 있었는데 그것이 최근 매스컴에서 다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최근에 두드러진 현상인지 모호하지만 혐오가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 것은 사실이다. 


일자리를 만들고 문화공간과 쇼핑시설이 들어오는 것은 환영하지만 화장장이나 최근에 문제가 된 싸드같은 시설이 들어오는 것은 혐오한다. 이렇듯 혐오라는 것은 나에게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것에 대해 방어하는 심리를 말한다.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퍼져가고 있는데 최근에는 여성에 대한 혐오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가 분노와 결합이 될 때 문제가 크게 부각이 된다. 차를 운전하다가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자신을 무시하는 대상에 대한 혐오가 분노와 결합이 될 때 폭발한다. 그것이 범죄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사람이 차량을 이용한 분노 범죄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과거에는 부자들을 혐오해서 범죄를 일으킨 지존파들도 있었으나 최근의 사례를 보면 주로 약자를 대상으로 일어난다. 사회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사들을 보면 모두 잘 사는 것 같은데 자신만 제대로 못 사는 것 같고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만난 사람들의 눈빛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고 그중에 여자들은 더 그렇다고 느낀다. 온라인에서 여자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나오는 글들을 보면 대한민국 평균 수준의 남자들조차 루저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자신들은 무엇이 잘나서 그러는 것일까? 불특정 다수에 대한 혐오가 극대화되고 어느 순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상대가 강자였으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이 나약하지 않고 낙오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약자를 선택했다. 꼭 여성이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 본인보다 약자였기에 희생자가 되었다. 


정치하는 사람이 예전부터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국민들을 편 가르기 하는 것이다. 그래야 여론이 분열되기 때문이다. 담배에 붙는 세금을 올리기 위해서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구도로 나누고 술에 붙는 주세를 붙이기 위해서는 과도한 음주로 인한 피해사례를 부각한다. 경유차에 붙는 세금을 올리기 위해서는 휘발유차에 붙는 세금(사실 소득 대비 기름에 붙는 세금은 OECD 최고 수준이다)과 비교하여 혜택이 과하다는 식으로 몰아가면 된다. 이렇듯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놔둔 채 적당하게 책임을 물을 누군가를 찾으면 된다. 


한남충과 김치녀로 대표되는 남녀 대결구도는 매스컴과 일부 인터넷 소통방이 만들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점이 수면 아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경제가 급성장하면서 국가의 모든 힘이 개발로 흘러들어갔고 부동산은 폭등했다. 부모세대의 남녀관계는 평등하지 않았지만 먹고살만했고 높은 경제성장률 속에 경제적으로 그렇게 부족하지 않았다. 복지는 형편없었지만 그냥 살만하기에 참고 살았다. 일자리가 있었기에 사회에서 낙오되는 사람보다 사회에 수용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았다.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인성교육보다 남보다 잘 살기 위한 교육시스템에 물들어갔다.


90년대 후반부터 식어가던 한국경제 엔진은 2000년대 들어서 더욱더 느려지기 시작했다. 복지나 사회의 안전망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빠르게 세계화된 결과로 인해 한국의 일자리는 빠르게 사라져갔다. 선진국형 산업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지만 대기업들은 이윤을 극대화하면서 인력구조조정과 함께 하청업체 쥐어짜기에 들어갔다. 


양질의 일자리는 사라졌고 국가나 정치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사회의 양극화는 심각해질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중간 수준의 일자리는 없어지면서 양질의 일자리 아니면 한 달을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수입만 보장되는 일자리만 남았다. 돈을 벌어 집을 사고 여름과 겨울에 한 두 번 여행을 가고 그냥 먹고살 수 있었던 부모세대를 보면서 자란 사람들의 상당수는 갑자기 패배자가 되어버렸다. 지금의 학교는 인성교육은 둘째이고 성적으로 줄 세우기 하면서 뒤쳐진 학생들은 누구도 신경 써주지 않았다. 그렇게 사회로 배출된 사람들은 갈 곳 없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곳곳에 잠재해 있었다. 


사회 구성원으로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결혼도 하고 싶지만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남녀 편 가르기식의 인터넷 여론이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문제가 저들(여성)이 미웠고 멀쩡하게 거리를 잘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싫었다. 싫은 감정은 점차로 대상을 가리지 않는 혐오로 바뀌어갔고 이는 증오로 돌변했다. 자신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지만 이런 사회에서 무기력하게 되어버린 게 자신 때문이 아닌데 마치 자신을 패배자(급여 수준, 자차 보유 여부 등등)로 만들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들의 혐오는 이 사회가 낳은 괴물 중 하나다. 


한국사회는 상당한 수준의 고비용 사회에 들어섰지만 그것에 비해 급여 수준은 따라가지 못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터넷 등에서 언급되는 수준으로 올라갈 방법도 없고 각종 SNS에서 자랑질(실제 있는 사람들은 안 하는 그런 행동) 속에 배려란 없었다. 


이 같은 현상을 단순히 여성 혐오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디선가 있을지 모르는 혐오 폭탄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포켓몬 go처럼 증강현실 앱을 켜면 혐오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갔는지를 알 수 있는 혐오몬을 구별할 수 있지 않다면 말이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공론화하고 상담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이상 사회의 문제를 개개인의 문제에 국한된 것처럼 편 가르기 하는 매스컴의 행동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박동진 명창 명고대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