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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10. 2023

인간 최치원 (崔致遠)

하동 운암영당에 자리한 최치원의 초상

시대를 아우르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최치원은 통일신라 6두품의 유리천장에 갇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태어난 피 혹은 뼈가 남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계급이 정해져 있던 신라에서 성골이나 진골이 아니라면 자신의 꿈을 펼칠 수가 없었다. 뛰어난 천재로 불리기도 했으며 당나라에서도 그 이름을 떨쳤던 사람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최치원은 지금 이 땅에 최씨중 가장 많은 경주 최 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최치원의 흔적을 하동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다. 하동의 운암영당에 모셔진 최치원의 초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7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제작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쌍계사에서 두 번째로 제작된 최치원의 초상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쌍계사의 연래각에 있다가 조선 순조 25년(1825) 화개에 금천사가 창건되면서 그곳으로 옮겨졌다가 서원 철폐령으로 금천사가 철폐되고 하동향교로 옮겨졌다가 1924년에 최치원의 후손이 많이 사는 곳인 이곳에 운암영당을 짓고 옮겨왔다고 한다. 

정신적인 지주가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는 우리의 사상과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우리 스스로 제시하고 이를 표현하였으며 억지로 일을 시키지 않고, 말없이 행동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 노자의 가장 뛰어난 부분이며, 악행은 만들지 않고, 선행을 높이는 것은 부처의 감화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는 통일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는 것이 많지가 않다.  신라에서는 837년 한 해에만 216명이 당나라에 유학생으로 떠났을 만큼 당나라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고, 당나라 유학 경력이 있으면 신라에 돌아와서도 출세길이 보장된 코스로 최치원은 떠나게 된다. 

우연하게 하동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다가 만난 운암영당에서 다시 인간 최치원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렇게 당나라로 떠났던 최치원은 산둥반도 등주에서 겨울을 보낸 뒤 만 28세인 885년 당희종이 신라왕에게 내리는 국서를 가지고 통일신라로 귀환하게 된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바치고 6두품의 한계인 아찬(阿飡)까지 임명되는 등 최치원에 대한 신라왕실의 신임은 상당했지만 그는 국가를 바꾸고 싶었다. 

최치원은 일찍 은퇴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능력이 쓰일 곳이 있었지만 신라가 쇄망해가는 가운데 최치원은 898년 2월 은퇴했으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898년 은퇴하여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지를 돌아다니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최치원만큼 많이 돌아다닌 사람이 없을 정도로 흔적을 많이 남겼다. 

중국에 남은 최치원의 흔적을 다루고 있으며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젊은 시절 중국에서 지내던 최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최치원에서 유려된 것으로 가장 알려진 지명으로 부산의 해운대다. 

秋風唯苦吟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世路少知音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는 시는 최치원이 지었던 시다. 하동에도 남아 있는 인간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운암영당에 서서 시대를 달리했던 그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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