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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26. 2023

마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속이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특히 한국 사람들의 자식사랑은 유별나기로 유명하다. 그 사랑은 자식을 근본적으로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옳고 그름, 공감, 진실된 사랑, 사람에 대한 배려등은 부모가 바람직한 관점으로 아이를 양육할 때 생기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었다고 해서 아이가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니다. 자칫하면 세상이 부모처럼 자신을 대해줘야 한다는 왜곡된 관점이 생길 수도 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왜곡된 자아 혹은 가치관은 범죄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영화 마더는 잘못된 모성애로 인해 왜곡되고 자신의 삶조차 망가트린 한 여성의 모습을 그린 영화다. 그녀에게 아들 도준은 온 세상과 마찬가지다. 나이답지 않게 제 앞가림을 못 하는 어수룩한 그는 자잘한 사고를 치고 다니며 엄마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한 소녀가 살해당하고 어처구니없이 도준이 범인으로 몰리면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과정을 그렸다. 개인적으로 바닥 모를 사랑과 희생정신, 엄마에 게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을 경험해 보면서 성장하지 않아서 그런 엄마는 어디엔가는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해본다. 

이 글은 영화 마더를 소개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엄마라는 존재가 생각하는 모성애가 과연 자식에게 온전하게 좋은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최근 아침에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한 번 통화할까 말까 한 여자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물론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는 편이다. 그렇지만 착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관계는 지속되어 왔다. 갑작스럽게 온 전화에서는 그녀가 오늘 시간이 되냐고 물어왔다. 보통은 매일 할 일이 있기에 바쁘다고 하려다가 이 시간에 전화한 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급한 것은 없다고 말해주었다. 


자신의 아들이 학교폭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을 하며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해서 바로 물어보았다. 아들이 가해와 피해중 어느 쪽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녀에게 가해라는 답이 왔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아들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는데 아주 착한 아이이고 자신이 집에 오면 어떤 일들을 해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기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영화 마더 속에서 엄마 혜자가 아들 도준을 바라보았을 때 아들의 문제를 똑바로 직시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 자식이 그럴 일 없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자신의 자식을 키우면서 생기는 수많은 일들 중에 자식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을 필터링하고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만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물론 안 좋은 기억을 계속 남기는 것이 좋지는 않지만 한계에 이르러 결국 문제로 촉발될 것까지 잊어버리고 심지어 자신까지 속이면서까지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친구와 만나서 변호사와 상담을 하는 곳까지 가 달라는 요청에 같이 동행을 했다. 솔직히 그 아들에 대한 정보는 그 친구를 통해 들은 것이 전부여서 무척 단편적이었다. 필자는 건너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에 대해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는다. 만약 판단을 한다면 직접 보고 이야기를 해본다. 그것이 연예인이나 뉴스에서 언급되는 사람일지라도 아무런 비판이나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한다. 학교폭력과 관련된 사건의 개요에 대해 들었지만 우선 가해의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많이 느껴졌다. 


학교폭력은 성적인 것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검찰의 일부 문서를 확인한 결과 상당히 심각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법적인 결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물론 필자는 그 친구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그 친구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선택이 무엇인지와 왜 그런 일이 발생했고 아들과 친구사이의 관계들을 물어보았다. 정확한 것은 필자가 아들을 만나봐야 알겠지만 그런 입장도 아니고 그런 역할을 자처하고 싶은 생각은 있지 않았다.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연계될 경우 학교 측의 처리와 법적인 처리가 병행이 된다. 법적인 것은 촉법소년이나 촉법소년이 아니냐에서 많이 갈리게 되는데 촉법소년의 경우 가정법원에서 판단하지만 촉법소년이 아닌 경우 일반법정에서 판단하게 된다. 이 두 차이는 상당히 다르다. 

사람들은 법에 대해 많이 오해를 하고 있다. 우선 변호사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변호사는 돈에 의해 성실해지기도 하고 대충 마무리하기도 한다. 법은 주관적인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범죄와 관련된 것은 CCTV 영상과 같은 객관적인 자료가 없더라도 피해 여성의 일관적이 진술이 있다면 우선 법정다툼이 시작이 된다. 그 사건에서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경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성추행을 당했다는 몇 명의 학생에게 일관성이 있었구나라는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필자로서는 많은 대화를 하면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그 아들을 모함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사건이 너무 많이 진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학교는 경찰과 검찰의 판단이 내려오면 학폭위를 열기로 잠정적으로 보류를 했었는데 이미 어느 정도 판단이 내려져서 곧 열리게 될 것이었다. 세상에 자신의 자식만큼 착하고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없고 가해를 할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이미 벌어진 사건은 어쩔 수가 없다. 법적으로 어쨌든 간에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쉽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영화 마더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고 아들에 대해서만큼 맹목적인 희생이 과연 아름다운 모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필자는 그 사건이 인생에서 파국이 될 만큼 심각한 사건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분명히 정말로 아무런 일은 하지 않았다면 무죄를 다투어볼 일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건은 부위에 차이가 있지만 분명히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을 했다. 정말 아이에게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어려운 일 일 수 있다. 당연히 자신의 자식은 자신이 믿을만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학교폭력을 저지른 학생의 부모들은 피해자를 공격하기 위해 피해자의 숨어 있는 악의를 끌어내려고 한다. 그 악의가 있다면 가해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때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인정해야 할 때가 있다.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용기다. 사람의 감정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세상을 왜곡해서 보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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