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양지

충재 권벌이 머물렀던 너럭바위에 세운 봉화 청암정(靑巖亭)

태어나면 사람들은 결국 무언가가 되어간다. 아이, 청소년을 거쳐 젊음의 에너지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제 청년이라는 연령대가 과거보다 폭 넓어졌다. 장년과 노년도 더 뒤로 물러선 느낌이다. 일반적으로 청(靑)이라는 한자는 오색(五色)의 하나로 봄, 동쪽, 젊음 등을 의미한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오히려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의 청출어람(靑出於藍)은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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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의 나이에 이곳에 내려와 머물렀던 사람이 있다. 이곳은 유곡마을로 충재 권벌의 5대조 예의판서(禮儀判書) 권인(權靷)이 안동에서 봉화 닭실로 이주했다. 마을 앞을 흐르는 석천계곡에 있는 석천정(石泉亭)은 유곡마을의 대표경관으로, 주변의 울창한 송림(松林), 계류(溪流), 아름다운 수석(水石) 등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명승지로 청암정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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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의 나이는 가장 에너지가 넘치기도 한다. 청암정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초록의 에너지가 넘치며 경험도 같이 가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마을모양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라 닭실마을이라 부르게 된 곳이기에 분위기가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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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 권벌은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책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랫사람에 더없이 관대했다고 한다. 어디에 치우치지 않고 그는 기호지역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를 조정, 화합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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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 권벌이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은 기묘사화 때였다. 그와 관련이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조광조 일파를 제거할 때, 연루시켜서 파직당하고 귀향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유곡마을이다. 1520년(중종 20년) 안동부(安東府) 내성면 유곡(酉谷)에 은거하였으며 약 15여 년간을 이곳에서 머물면서 공부하고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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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남정은 종가 우측에 위치하며 거북바위 위에 건립되었으며 정자 둘레로 물이 흐르고 그 밖에는 나무 울타리가 처져 있다. 동. 남, 북쪽으로 3개의 문이 있으며 정자 1동 외에 충내 권벌이 공부하던 별채가 남아 있다. 그의 인생을 보면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을 때가 가장 평온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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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유곡마을을 돌아본다. 매일매일을 이곳을 오가면서 삶에서 가장 평온한 15년을 보냈을 것이다. 그는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 윤원형 세력이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세력을 배척, 역모로 몰았다. 이때 유관과 유인숙의 이름까지 언급되자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는 불가함을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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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맑음의 양지가 느껴지는 곳이다. 마치 하나의 산림이 고유하게 보존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이곳에 머물러보며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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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은 연못을 사이에 두고 근사재와 마주하고 있는데, 돌다리를 건너 자연 암반을 깎아 만든 계단을 지나 마루에 오르도록 되어 있다. 청암정에는 권벌의 글은 물론 미수 허목, 퇴계 이황, 번암 채제공 등 조선 중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의 친필로 쓰인 현판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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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 수선화가 피어 있고 작은 연꽃도 피어 있는 이곳에는 작은 시내가 흘러 바위로 내달리기도 하고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높이가 한 장을 넘고 바위 색깔이 매우 푸르렀기 때문에 이름을 청암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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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발을 내리고 수렴청정을 최초로 시도한 대왕대비 문정왕후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을 때인 1547년(명종 2)에 한성 양재역에서 한글로 문정왕후를 비방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발생하였다. 그는 벽서를 붙이거나 벽서와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유곡에 있었지만 곧 구례(求禮)에 유배되었다가 1548년(명종 3) 3월 26일 삭주의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었다. 시신은 임시로 매장했다가 그해 겨울에 봉화현(奉化縣)의 유곡산((酉谷山)으로 운구하여 아버지 권사빈의 묘소 아래에 매장하였다. 삶이 푸프름을 지향한다면 젊음의 양지는 언제든지 자신의 옆을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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