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자리한 동명이인의 오래된 고택
일제강점기에 주먹 하나로 풍운아처럼 종로를 휘어잡았던 사람으로 김좌진의 아들이기도 한 김두한이 있었다. 근현대사 인물로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이며 공도 있지만 과도 많았던 사람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그냥 흘러갔던 사람으로 정치에 의해 주먹을 이용당하기도 했다. 김두한의 한자는 金斗漢으로 그와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이름의 고택이 원주에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고택은 주먹의 김두한이 아니라 김탄행이라는 사람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택으로 문화재 지정 당시 가옥의 소유주의 이름을 땄다.
김두한고택은 진정으로 터 잡고 살고 싶은 고장이라는 문막읍에 자리하고 있다. 문막 8경은 오서산과 섬강이 만들어내는 조화 속의 아름다운 8곳을 의미한다.
문막에서 볼만한 8경으로 건등초적(건등산에서 부는 아이들의 피리소리), 성암모종(성암사에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저녁 종소리), 명봉조일(명봉산에 떠오르는 아침 해), 경정한운(경전산에 걸쳐 노니는 한가로운 구름), 취병단풍(취병산에 붉게 물든 가을단풍), 남도명월(남도 물 위에 떠있는 밝은 달), 구첩낙조(구첩산에 떨어지는 저녁노을), 뮌양귀범(문막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풍경)이다.
훗날 영조가 된 연잉군은 자신을 보호해 주던 노론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노론들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소론들에 의해 쫓겨나고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생활을 보내게 된다. 왕세제로 가는 모든 소통과 관련된 사람들을 차단하고 그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의 접근도 막았다. 연잉군은 목숨까지 위태로워지는 것이 두려워서 왕대비에게 왕세제라는 작호를 거두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연잉군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소론들은 이 기회에 노론들을 완벽하게 제거하고자 고변 사건을 기획하였다. 왕세제를 보호하던 세력의 핵심세력 집안 출신인 이천기와 김용택 등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김용택은 자신들의 대화가 새나갈 것을 우려해서 묵호룡이라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는데 남인 집안의 서얼 출신이었던 묵호룡이 발 빠르게 경종을 시해하려 한다는 내용의 고변을 하였다.
그 사건이 이른바 임인옥사로 1722년(경종 2)에 영의정이었던 김창집과 아버지인 김제겸이 사사되고 어린 나이에 지금 충청남도 금산에 유배된 사람이 숙평 김탄행이다. 임인옥사로 삼대를 모두 몰살시키지는 않아 대를 이을 수는 있었다. 시간이 지나 소론이 몰락하고 노론이 집권하자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조선시대에 괜찮은 가문의 집은 묘를 관리하기 위해 고택을 지어둔다. 묘를 관리하는 사람이 거주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다. 후대에 가옥의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만든 김두한 가옥은 남자들이 생활했던 사랑채와 여자들이 생활하는 안채의 부엌 앞쪽에 이어져 있는 곳이다.
관리와 의례 행사의 편의를 위하여 집의 구조가 기능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조선 후기의 건물로 부엌 중심의 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김탄행은 여러 관직을 거치게 된다. 장흥고주부, 장례원사평, 서흥현감, 원주판관, 금산군수, 남원부사, 첨지중추부사등을 지냈다. 이곳에 묘를 쓴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여주였기 때문이다. 여주는 원주와 가까워서 같은 생활권이다.
당파가 다르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상대방은 무엇을 해도 잘못이 되었고 자신의 편은 무조건 감싸주는 것이다. 지금의 정치모습과 조선시대와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가옥의 특징이 음식을 하고 그 준비를 하기 위한 기능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한자까지 같은 한자를 사용했던 김두한가옥이라고 해서 드라마나 영화 속의 김두한을 연상할 수도 있지만 이 가옥은 그 사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알려진 것은 많지 않지만 김탄행의 운명은 왕세제였던 영조와 비슷한 느낌이다. 1714년에 태어난 김탄행과 1694에 태어난 영조는 20년의 차이지만 모두 노론과 소론의 대립속에 살았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