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에펠탑은 프랑스의 상징이 되다.
물리학자이자 전기공학자로 지금의 스마트폰 기술의 기반이 된 무선 통신을 최초로 실현하였으며 자기장의 국제단위의 이름을 딴 사람, 미국의 대표적인 발명가, 최고의 건축가중 한 사람, 절규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화가, 살아생전에 인정받지 못했지만 사후에 종합주의 색채론을 안착시킨 사람이 모두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순서대로 니콜라 테슬라, 에디슨, 안토니 가우디, 에드바르 뭉크, 폴 고갱 등은 모두 이 유명한 건축물을 보기 위해 방문했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에게 패하여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그때의 기술로 최고의 높이 건축물을 지으려는 목표를 세웠다. 그 D-Day는 바로 1889년으로 프랑스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즉 오늘날의 EXPO를 생각하면 된다. 대전의 경우 대전 EXPO가 열렸지만 그다지 인상 깊은 상징적인 건축물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엑스포타워가 있지만 대전 사람들만 알지 외지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에펠탑의 건축 높이는 300미터로 당시에는 경이로운 높이였다.
프랑스의 건축가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 1832~1923)은 당시 대중이 느끼는 시각적인 충격은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은 에펠탑은 꼭 보려고 방문한다.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높은 건축물을 세우는 것은 오랜 시간 유효한 방법이었다. 아무 쓸모없는 것에 돈을 들여서 대형 건축물을 세우는 방식이다.
자유의 여신상과 더불어 에펠의 양대 걸작으로 꼽히지만 당시에는 온갖 욕이라는 욕은 다 먹은 건물이기도 하다.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예술의 도시 파리의 미관을 망치는 흉물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렇지만 여러 영화의 배경으로도 등장했고 작년에 개봉했던 존윅 4에서도 에펠탑은 당당하게 배경으로 활용이 되었다.
철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유가 있는데, 300m 수준의 높은 구조물은 풍압의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에 바람을 통과시키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진천의 농다리가 그런 방식으로 지어진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최근 어번스케치로 에펠탑을 그려보았다. 특정 대상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없어도, 대상이 수용체에게 많이 노출되고 그 대상과 오랫동안 함께 지낼수록 그 대상에 대해 호감을 지니게 된다는 이론을 에펠 탑 효과라고 한다.
사람들은 별거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주 노출되면 신뢰를 부여하고 좋아한다고 착각을 한다. 그걸 에펠탑 효과라고도 부른다. 박람회에서 홍보한 또 다른 새로운 기술은 미국의 오티스 엘리베이터에 의해 새로 개발된 안전 엘리베이터였다. 그전까지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 박람회는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습격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차원에서 열렸으며 경제를 활성화하고 프랑스를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어린 왕자가 유럽을 갔다면 에펠탑을 보기 위해 가지 않았을까. 앙투안 장밥티스트 마리 로제 드 생텍쥐페리(Antoine Jean-Baptiste Marie Roger de Saint-Exupéry)라는 긴 이름을 가진 작가 역시 프랑스 사람이다. 죽음 속에서도 깨지지 않는 사랑의 결합을, 우정과 연대의 숭고한 노래를 매혹적인 소박함과 아름다움의 이미지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파리의 에펠탑도 영원히 살아남아 파리의 상징으로 기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