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주문화관 1918 특별전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웃음이 많았으며 자식을 사랑했던 노인은 침대에 누워 힘들게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는 까칠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당당함을 기반으로 살았었지만 이제는 가족을 사랑하는 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 노인이 숨을 거두기 직전 아들에게 말을 한다. 한국에서는 3.1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이었다.
“팔레트와 붓을 가져오너라. 꽃을 그려야겠다.”
그는 힘들게 꽃을 그리고 난 후에 그림을 건넸다고 한다. 원래 그가 살고 싶었던 삶은 도예 분야였다. 그렇지만 손수 제작을 하던 도자분야는 기계에 밀려 도자기에 그려지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역시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하얀 화폭에 그려졌고 그의 그림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 그림을 그리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제야 비로소 그림이 뭔지 이해되는데······”
KTX가 지나가는 경주역은 경주의 외곽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도심에 있던 경주역은 경주만의 역사와 의미를 담은 역사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2024 경주문화회관 1918 특별전으로 르누아르, 삶의 기쁨과 행복을 그리다 전이 열리고 있었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지역에서 태어나 예술적 분위기가 가득한 환경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장 르누아르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즐거운 미적 감상의 기회를 마음껏 누릴 수가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화가와 모델들이 많이 있었다. 그렇게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준 아버지는 바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다. 그는 둘째 아들로 태어나 후에 유명한 영화감독이 된다.
도예노동자의 삶을 살다가 화가로 전환한 르누아르의 초기 그림들은 빛의 색채가 가득했으며 인상파화가 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밝은 색채를 머금고 화사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화가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만해 보이는 모습도 보였지만 정확한 자기 진단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내 예술의 특징은 ‘설명 불가능’과 ‘모방 불가능’, 이 두 가지이다. 이로써 사람들이 내 열정 속으로 휩쓸린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뭉크처럼 혹은 다른 화가들처럼 어둡고 우울한 색감의 그림은 없다. 그가 남긴 5,000여 점의 그림 가운데 꽃과 과일 등 정물을 가장 많이 그렸는데 화가 중 유일하게 슬픈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상에는 어두운 것들도 있고 보기 싫은 것들도 수없이 많다. 그렇기 때문일까. 르누아르는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해야 하며 불쾌한 것 투성이의 세상에서 아름답지 않은 것을 일부러 그릴 필요가 있을까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필자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리고 싶어 하는 듯하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묘사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화려함과 여유로움, 형식과 자유를 한 화폭에 담는다면 그것만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그릴 수가 있다. 르누아르는 특히 정교한 윤곽선으로 유명한 화가로 당대에 세밀한 손기술을 따를 화가는 없었다고 한다. 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부모에서 자신에게로 그리고 자식에게로 이어지는 것은 재능이며 성정이기도 하다.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 그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여럿이 있었다. 특히 바지유의 배려는 남달랐다고 한다. 자신의 집에 함께 먹고살면서 경제적인 부분을 모두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나 때문에 자네까지 풍족하게 살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이. 내가 자네 식량은 물론 물건까지 빼앗아 쓰다니."
- 르누아르가 바지유에게 남긴 쪽지
"장래가 촉망되는 좋은 친구와 함께 작업할 수 있어 늘 행복하다네."
- 그 쪽지에 바지유가 르누아르에게 남긴 쪽지
르누아르의 후기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기쁘고 행복에 가득 차있는 사람을 볼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르누아르에게는 힘든 고난이 찾아왔다. 그의 가장 큰 후원자이며 믿어주었던 친구 바지유는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에서 패전한 프랑스는 이후 1889년 에펠탑이 모습을 드러낸 만국 박람회로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게 된다.
르누아르는 본래 여성미가 넘치는 인물화를 그리기 좋아했으며 엄격한 고전주의보다 자연스러움과 욕망이 담긴 건강하고 참신한 풍경을 담았다. 50이라는 나이에 결혼을 처음 하게 된 르누아르는 더 여유로운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꽃다발도 화병에 담긴 정물화에서 바람에 자유롭게 날리는 꽃다발의 모습으로 그렸으며 사람의 살빛을 더 생생한 붉은색으로 칠한 것을 그림으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그림은 사람의 영혼을 맑게 씻어주는 환희의 선물이어야 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그림을 그린다."
"인생의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후기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의 색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 화가로 불리게 된다.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앍으면서도 수백 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그림에는 절망이나 어두움은 없으며 따뜻함과 평온함만 담겨 있었다. 그는 숨을 거두기 며칠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그림은 여전히 발전하고 있어."